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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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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예술인을 담다] (1) ‘쓰는 자’ 성윤석 시인

“목적없이 쓰는 사람들, 그들이 진짜 예술가”
여섯번째 시집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펴내

  • 기사입력 : 2023-01-16 2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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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는 문장을 발명하는 것. 제 시집은 이 위대하고 순수한 예술 행위를 목적 없는 상태로 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윤석(57) 시인이 최근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아침달)를 펴냈다. "스스로가 지겹다"는 시인은 그의 여섯 번째 시집에 해설, 발문, 추천말 등 부가적인 것들을 다 빼고 오로지 시만 담아냈다. 시집 제목 또한 시집 속 시 제목이 아닌 두 줄짜리 저자의 말에서 따왔다.

    극장(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1996), 묘지(공중 묘지·2007), 어시장(멍게·2014), 화학실(밤의 화학식·2016) 그리고 미래(2170년 12월 23일·2019). 자신이 직접 경험한 공간을 넘어 시간까지 시집으로 엮어냈던 성윤석 시인의 다음 시선은 어디로 향했을까. 지난 14일 마산어시장 근처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지난 14일 마산어시장 인근 카페에서 만난 성윤석 시인이 신간 시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14일 마산어시장 인근 카페에서 만난 성윤석 시인이 신간 시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짜' 예술인 예찬하는 시집= 시집에 담긴 의미를 묻자 시인은 사진 작가 비비안 마이어(1926~2009)를 언급했다. 비비안 마이어는 스스로 무명을 택했지만 사후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세상에 알려진 사진 작가다.

    "우리 주변에도 목적 없는 예술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반대로 문단에서는 발표와 수상을 목적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자칭 예술가들이 보여요. 이렇게 시집을 내는 저 또한 그들과 비교하면 가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패배감과 질투심을 느끼죠."

    목적 없는 예술 행위에 느끼는 시인의 패배감은 시집의 첫번째 시 '경주하는 슬픔'에서 절실히 드러난다. 시의 흐름은 이렇다.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패배한 토끼는 재경기를 요청했다. 재경기에서 전속력으로 달려 결승선을 넘은 토끼. 하지만 거북이가 오지 않자 토끼는 되돌아 출발지를 향해 뛰었다. 다시 거북이를 만났을 때, 토끼보다 앞서 있는 건 거북이였다.

    거북이에게서 시집 제목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의 그녀가 투영되기도 한다. 그녀는 누굴까. 시인의 아내는 아닌지 묻자 시인은 손사래치며 웃어보인다.

    "시집 자체는 1년 전부터 시집을 내지 않는 후배 시인과 동기부여 차원에서 쓴 시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완성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특정 인물은 아닙니다. 그녀는 '진짜 예술인'을 상징하는데 요즘 문학은 여성들이 많이 하고, 발표도 하지 않는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여성이 많아 그렇게 쓴 거에요."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쓰는 자'들을 위해 쓴 대표적인 시어는 마지막 시 '아티스트'의 마지막 문장이다. '단체로 오리배를 타러 갔는데 기어코 나는 진짜 오리를 타겠다고 선언하면서요.'

    "우스꽝스럽죠? 신선하고, 흥미롭고, 재밌고, 새롭고, 낯선 게 진짜 예술이잖아요. 대중적인 오리배만 탈게 아니라 오리를 타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예술가라 생각하고, 그들을 항상 응원합니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점은 출판사 '아침달'이다. 아침달은 젊은 시인인 큐레이터와 기획자가 등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접수된 원고를 블라인드 심사로 평가해 출간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시인들의 시집'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곳이다.

    성윤석 시인의 경우 오래 전 아침달로부터 원고를 부탁받은 적이 있었음에도 이번에 완성한 원고를 투고해 블라인드 심사를 받았다. 단순히 아침달에 속해있는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 한 행동이다. 떨어져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연락이 왔고 출간이 진행됐다.

    이날 노란색 시집을 살펴보며 시인은 소원하던 '아름다운 시집'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내용적인 아름다움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번 시집을 쓰면서 발표를 한번도 안한 신작시를 모아 엮자고 생각했고, 실제로 문예지 청탁이 들어오면 후배들에게 넘기고 작품을 써 시집에 담았다"며 "기존의 낡은 것들을 뒤집는 것이 문학인데, 이번 시집에는 '엎질러버린 문장', '기후 행동' 등 시처럼 문학적 실험을 많이 해 재밌었다"고 평했다.

    ◇지역서 젊은 시인 양성 앞장= 그동안 '괴짜', '아웃사이더', '반골'로 불리던 성윤석 시인의 행보가 최근 크게 바뀌었다. 과거 소통 없이 홀로 쓰기에 몰두했던 그는 현재 자처해서 지역 시인을 본격적으로 발굴하고 키워내고 있다. 계기는 지난 2020년 '시골시인-K'에 참가한 젊은 시인 6명이 직접 시인을 보기 위해 마산에 찾아왔을 때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다들 유명한 상도 받고 실력도 꽤나 있는데, 단지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찾는 곳도 발표할 곳도 없다는 거예요. 창작기금을 내주기로 하고 중앙에 기대지 말고 우리 지역이 중심이 될 수 있는 기획 시집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렇게 1년 만에 시골시인-K가 나오게 됐죠."

    시인은 그전부터 이메일로 전국 젊은 작가들의 시를 봐주곤 했지만, 직접 만나 도움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골시인-K는 중앙 중심으로 흘러가는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릴레이 프로젝트로 이어져 곧장 제주도 시인들을 중심으로 시골시인-J가 출간됐고, 오는 5~6월께 진주와 순천지역 시인을 중심으로 시골시인-Q(Question) 출간이 앞두고 있다.

    성윤석 시인은 지난해 12월부터 인천에 새 직장을 구해 인천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2주마다 꾸준히 마산을 찾는다. 시집 6편 중 5편을 완성했던 마산은 시인의 실질적 고향이기도 하지만, 마산 방문의 목적은 오로지 젊은 시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2주 간격으로 마산 창동의 한 목공소에서 '맹렬한 시 창작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시인의 주도로 만들어진 모임은 마산, 창원, 통영, 부산지역 젊은 시인 4명과 함께 시를 쓰고 각자 의견을 나눈다. 모임원들을 설명하는 시인의 말에는 어떤 확신이 묻어났다.

    "한명은 지역에서 자신이 최고로 잘 쓴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있고, 다른 한명은 오래 전에 신춘문예로 등단했음에도 시집 한편 내지 않아 2권 분량의 시가 쌓여 있어요. 이들과 계속 의견을 나누다 보니 시가 좋아지는 게 느껴져 훗날 지역을 대표하는 시집이 나올 거라 확신하고 있죠."

    시인은 그동안 지역에서 외롭게 홀로 무너지는 작가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일찍이 문단의 중앙을 경험했던 그는 이제 능력 있는 지역 젊은 작가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고 한다. "지역 청년시인들은 가진 실력에 비해 자존감이 약해요. 지방, 나이, 등단 여부 등 조건은 다 버리고 '쓰는 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또한 자기만의 학문의 세계를 넓히면서 실력을 키웠으면 하고요. 지역의 비슷한 수준의 작가들과 만나 소통하고 올곧게 활동해 나가면 어느날 지역문단을 주도하고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중앙에서 먼저 찾아올 거라 확신하죠."

    성윤석 시인
    성윤석 시인

    ◇'사랑' 그리고 '묘지관리인'= 첫번째 시집을 내고 시를 떠났다가 11년 만에 시의 세계로 되돌아온 시인은 시를 '세상에 없던 문장을 발명하는 위대한 작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시가 한명의 '친한 친구'같다고 한다.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지 33년. 공백기도 있었지만 여섯 개의 시집을 펴내며 문단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은 그지만 죽기 전까진 대표작을 꼽을 수 없을거라 말한다.

    대신 가장 기억됐으면 하는 시집은 스스로 저주받은 걸작이라 자평한 '밤의 화학식'을 꼽았다. 이 시집은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이 서울에서 바이오 화학 벤처기업을 차린 경험을 시로 풀어낸 작품이다. 시인은 "이 세상에 없던 시집이었기에 가장 오래 기억되면 좋겠어요"라며 이번 시집도 그런 면에서 꽤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차기작은 생각해두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언젠가 '사랑'과 관련된 시집은 꼭 쓰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 '사랑'처럼, 시인은 매번 시집을 낼 때마다 사랑과 관련된 시를 한 편씩 꼭 써왔다.

    "확실히 느낌이 올 때 시집을 써요. 지금은 그게 없고, 앞으로 꼭 써야 되겠다고 생각 들면 열심히 기획해 쓸 계획이에요. 제가 쓴 연애 시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줘서 인천 가서는 연애 시집을 한 번 써볼까하는 생각은 들어요. 사랑은 어찌보면 가장 오래된, 낡은 것인데 가장 새롭게 써볼까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후배들 때문에 시간이 잘 안나네요."

    시인 성윤석이 아닌 사람 성윤석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쓰다 만 소설을 완성해 보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과거 필명을 사용해 발표한 소설을 흑역사로 치부했던 그에게서 나온 의외의 답변이었다. 쓰다 만 소설의 제목은 '묘지 관리인'. 시인은 이야기를 풀어 쓴 평범한 소설 구성이 아닌, 에세이와 소설 그 사이 어떠한 문체로 무덤과 죽음같은 것들을 풀어낸 장편소설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질문으로 '경남'에 대해 묻자 시인은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강조했다. "경남은 옛날부터 문학이 굉장히 왕성했던 곳인데 최근에 명맥이 끊어지면서 젊은 쓰는 자가 많이 보이지 않아요. 근데 자세히 보면 먹고 살아야 하니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발표도 하지 않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의적으로 숨어 살거나, 혹은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지 못해 그 불빛이 머무르고만 있어요. 그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경남 문학이 무너지지 않는 길이고, 젊은 시인들을 위한 지원과 확대하고 기획만 잘 세우면 충분히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봐요."

    새해는 언제나 한겨울 1월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새로운 결심은 추운 환경에서 움튼다. 성윤석 시인을 만난 지난 14일. 마산에는 포근한 비가 내려 그동안의 추위를 달랬다. 목적 없이 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성윤석 시인의 시집은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까.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표지.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표지.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성윤석 지음, 아침달, 146쪽, 1만2000원.


    글·사진=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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