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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예술인을 담다] (10) '시로 만들어진 삶' 정일근 시인

  • 기사입력 : 2023-08-08 20: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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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상고 시절 ‘시인의 삶’ 살기로 결심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2년 전 마산 정착

    평생을 견딘 슬픔과 고통은 시의 양분
    최근 열네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 펴내

    내년 등단 40년 ‘마산 응축한 시집’ 계획
    “약이 되는 시, 시로 기억되는 시인 될 것”


    시로 삶을 살아온 정일근 시인(65). 시인은 한평생 시를 위한 공간을 택해왔다. 진해, 마산, 울산, 경주 등에서 저마다의 시를 써왔던 시인은 2년 전 마산에 정착했다. 3·15의거를 계승하고 부마민주항쟁을 겪으며 저항정신을 배웠던 이곳이 인생의 종착지란 생각으로.

    지난 7일 시인을 마산 창동에서 만났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와 경남대를 재학한 그에게 창동거리는 20대 친구가 70대로 걸어가는 거리다. 2시간 남짓한 인터뷰 중에도 시인은 거리를 지나는 계절과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시인은 최근 열네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을 발표했다. 시집은 코로나19 기간 써왔던 시 200여편 중 63편이 담겼다. 시인은 이번 시집을 내년 등단 40주년을 기념해 마산을 응축한 열다섯번째 시집으로 가는 노둣돌이자 다양한 시어를 담아낸 '박물지'라고 소개했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재학 시절 시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정일근 시인이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2년 전 마산에 돌아왔다. 사진은 지난 7일 정 시인이 마산용마고 개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정 시인은 이 기념비의 글을 지었다./김승권 기자/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재학 시절 시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정일근 시인이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2년 전 마산에 돌아왔다. 사진은 지난 7일 정 시인이 마산용마고 개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정 시인은 이 기념비의 글을 지었다./김승권 기자/

    ◇사라진 마산에 남은 정신처럼, 사라진 시인은 시로 기억되길= 정일근 시인은 담담하게 고백했다.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마산에 머물다 마산처럼 죽겠다고. 가능하면 부고도 알리지 않고 사라지겠다고.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문장과 시만 기억되길 바란다고.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바람은 100년을 뛰어넘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시를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자신에게 "백 년 가지 못하는 시는 써서 뭐 할라꼬. 백 년 견디지 못하는 종이에 그 시 찍어 또 뭐 할라꼬('뭐꼬' 中)"라 되물으며, "누가 읽든 단숨에 시의 꽃이 피지 않는다면 시인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목을 쳐야 하리('시를 쓰려면' 中)"라고 다그친다.

    시인은 마산 산호동에 마련한 작업실을 '청솔당(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라고 지었다. 해석하면 '열심히 세상 목소리를 듣고 시를 쓰겠다'는 뜻이다. 청솔당에선 시인이 마산에서의 삶을 시작했던 모교 마산용마고가 훤히 보인다. 시인은 학교를 졸업하며 교지에 남긴 한마디는 '문학과 함께 3년을'이다. 현재 마산용마고 정문 앞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시인이 기념비 글을 지었다.

    "고등학교에서 내 운명은 시로 결정됐다. 나의 문학적 정체성을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마산이고 창동이다. 마산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다."

    마산에 정착한 2년간 시인은 두 발과 자전거, 노선버스를 타고 마산을 담아왔다. 버스 높이에서는 마산이란 도시가 새롭게 보인다고 한다. 이동수단은 창작수단이 된다. 시집에 수록된 '은목서 사랑', '저기 동백이 오고 있다' 등이 이렇게 쓰여졌다.

    너 돌아선 뒤 피우는 내 꽃 좀 봐/ 그 향기에 놀라 네 되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 와락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작별하자 우리 꽃 시절 꽃 인연 거기까지니/ 나는 남쪽 바닷가에 홀로 지는 흰 꽃일 뿐이니. -'은목서 사랑' 中

    ◇항진하는 고래처럼, 고통에서 약으로= 정일근 시인은 '고래시인'이다.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을 만들고, 세계 최초로 고래 시집을 발간하며 고래를 주제로 한 시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환경보호적 관점에서 접근했던 고래는 그리움의 대상을 넘어 고래(孤來)로서 외롭게 나아가는 시인의 정체성을 투사하기에 이른다.

    이번 시집에서도 고래는 수차례 호명된다. 그 중 '고통, 고래'는 손이 퇴화한 포유동물이 작은 기생충에 의한 가려움을 이기기 위해 장중한 몸을 망망대해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면서 삶의 구석구석 닿지 못한 부자유의 고통을 시로 풀어내는 시인의 삶을 은유한다.

    실제로 시인의 창작은 슬픔에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4학년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시에 호소했다. 가난에서 눈물을 배웠고 시로 위로했다. 시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나간 백일장에서 장원에 당선됐다는 소식에 미소짓던 어머니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결심도 그때 하게 됐다.

    슬픔과 고통은 평생 시인이 견뎌내야 할 감정이었다. 1998년에는 뇌종양으로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다. 이후에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다가 고산병을 앓았고, 동티모르에서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했다.

    '운명'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시인으로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아낸 시다. 작살이 박혀 있음에도 밤에도 항진하는 숙명을 지키는 고래는 단단한 메타포로 활용된다.

    이번 시집의 서시인 '독활(獨活)'은 이순(60살)이 넘은 시인이 새롭게 쓰는 다짐이다. 온갖 고난과 고통을 경유한 지난 삶을 양분 삼아 약이 되는 시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불혹 지천명 지나며 작은 바람 큰바람에 흔들리며 휘어지고 꺾어져 아픈 상처 입고 깊은 병 얻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이 이순 지나 독활로 다시 일어섭니다. (중략) 바람에 상처가 난들, 또 덧난들 이제 무슨 대수겠습니까. 상처가 스승이어서, 병이 스스로 약을 찾아내는 일 아는 이 나이에 들어. -'독활' 中

    ◇물 밑에 갇힌 돌이 빛나기까지= 시가 삶인 시인은 이제 젊은 시인들로부터 시작될 시의 미래를 생각한다. 시가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절필을 선언하고 떠날 생각은 언제나 품고 있다.

    이번 시집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 마지막이 부끄러운 시인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세워 두달간 끊임없이 퇴고를 거쳐 완성된 것이다.

    "시는 계속해서 젊어지고 이어져야 한다. 나는 '오래된 문법'을 쓴다. 젊은 시인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 같이 탕탕 튀는 문법을 쓰며 새로움을 표현한다. 반면 나는 물 밑에 갇힌 돌이다. 그러나 물 밑의 돌도 달빛에 빛나는 것처럼 새로움이 있고 그 새로움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시인의 퇴고는 낭송과 필사로 완성된다. 시가 입 안에서 편하게 흘러가도록 소리내 읽으면서 수정한다. 이어 종이에 시를 한글자씩 써가며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낀다. 특히 필사의 경우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온 시인의 버릇이자 시창작의 양분이다.

    표제시 '혀꽃의 사랑법'은 이러한 본질로 향하기 위한 노력을 이야기한 시다.

    꽃이라 믿었던 꽃은 혀꽃일 뿐, 내가 감춘 주제를 읽기 위해 비유부터 더듬어 오는 당신처럼 사랑이든 벌 나비든 혀꽃을 향해 날아드는 거지. 그것이 열매 맺지 못하는 헛꽃이지만 슬픈 사랑은 아냐. 혀가 끝나는 곳에 내가 가진 가장 뜨겁고 단단한 바라밀이 숨어 당신 기다리고 있지. -'혀꽃의 사랑법' 中

    '혀꽃'은 해바라기, 민들레 등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의 꽃 가장자리에 피어난 '설상화'와 동의어다. 혀꽃은 번식 능력 없이 화려한 색으로 곤충을 유인하는 역할을 하는데, 시적 표현인 은유이자 직유이자 비유와 유사하다. 식물의 번식 능력을 가진 '관상화'를 '바라밀'로 표현했다.

    정일근 시인의 열네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
    정일근 시인의 열네번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

    시인은 혀꽃은 '인생의 길'이라고 말했다. 번식을 위해 혀꽃을 만드는 구조로 진화한 식물처럼 우리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시인은 내년 등단 40주년을 맞는다. 목표는 뚜렷하다. 40주년에 맞춰 '마산'을 응축한 열다섯번째 시집을 발표할 계획이다. 또 시 낭송가들을 위한 애송시집과, 30여년간 써온 '경주남산' 연작시를 묶은 시선집도 준비 중이다.

    "젊을 때는 가슴으로 시를 썼다. 나이가 들자 점차 문장을 생각하게 된다. 한 문장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문장이 어떻게 뾰족하게 깎인 연필처럼 독자의 가슴에 꽂힐 수 있을지 고민한다."

    시인은 등단 39년을 넘어 65년 인생 가까이 슬픔에서 비롯한 창작욕을 펜 끝으로 표출했다. 중지, 가운뎃손가락 첫마디 왼편에 굳은살로 자란 펜 혹을 도려내는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시인의 향기는 펜 혹을 도려낸 상처에서 피어난 시인의 꽃에서 시작된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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