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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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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정돈의 봄- 권영유 시인(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 기사입력 : 2024-03-21 19: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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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이 정리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던 시절 죽마고우 절친 동숙이의 집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스무 살 무렵 동숙이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방 안을 차지한 옷장과 피아노가 갑갑해 보였다. 나는 자꾸만 그 가구의 위치를 바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귀찮다며 그냥 있겠다 했지만 나는 갈 때마다 졸랐고, 우리는 결국 실행에 옮겼다. 꽤 무게가 있어 낑낑대며 위치를 바꿔야 했지만 다 하고 나니 분위기가 확 달라 보였다. 우린 좋아서 손뼉을 쳤다.

    가끔 딸의 방을 둘러볼 때가 있다. 처음에는 자잘한 소품들만 사 모으더니, 점점 부피가 큰 고양이 캐릭터 물건까지 방 안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옷에 붙은 상표나 영수증까지도 챙겨놓는 바람에 마치 소품들의 숲처럼 보였다. 어느 날 정리 좀 해줘야겠다고 두 손 걷어붙이고 있는데 마침 딸이 돌아왔다. 엄마, 정리하지 않아도 돼. 알아서 배치해둔 거야. 이렇게 뒤죽박죽이 정리가 된 거라고? 마지못해 나왔는데 그것이 정말 정리가 된 거였다. 딸이 친구 전화를 받고 물건을 찾는데 손을 뻗더니 제대로 척 손에 쥐는 게 아닌가. 그때 생각했다. 정리란 자신만의 방법이고 남과 다른 패턴이 있다는 것. 이제는 딸 방에서 뭔가 정리되지 않은 걸 정리된 것으로 보는 눈이 생겼다. 어떤 패턴인지 보는 것도 재미다.

    등단 후 달라진 게 있다면, 인터넷상에 내 이름 석 자를 검색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검색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글을 올리는 이 또한 정리가 잘 된 사람이었다. 신작시, 추천시 등 게시판별 글들이 정갈한 폰트로 올려져 있었다. 나도 그런 몇몇 블로거를 북마크하는 것으로 인터넷 창을 정리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창밖 나무들도 제 가지마다 움트는 새순을 잘 정돈해 놓는다. 너무 과하지 않게 너무 괄하지 않게 새록새록 올라와 있다. 봄이라는 계절도 햇살의 검색으로 꽃들이 노출되는 게 아닐까. 내겐 꽃이 피기 전까지는 그냥 모두 줄기며 빈 나뭇가지일 뿐인데, 봄볕은 나무마다 키워드를 정확히 검색해낸다. 동백과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로 이어지는 연관검색이 계절감이 아닐까.

    오랜만에 동숙이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전해온다. 포도를 가꾸기 위해 가지치기를 마쳤단다. 동숙이에게는 시골에서의 가지치기도 정리정돈이겠다.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튼실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얻으리라. 동숙이 남편은 공무원이었는데 퇴직하고 농장을 하는 여생을 즐기고 있단다. 동숙이도 일생을 일과 여가로 잘 정돈하며 지금의 나이에 이른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나도 뭔가 더 수습하고 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베란다에서 습관처럼 올려다본 메타세쿼이아도 작년에 속절없이 뭉텅 잘려나간 가지 끝자락에서 깃털 같은 연두 잎이 나오고 있다. 오늘따라 햇살이 산수유 꽃잎에 오래도록 머물다 간다. 그걸 바라보는 나도 봄볕에게는 뭔가 틔워낼 검색 대상인가 보다.

    권영유 시인(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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