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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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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⑤ ‘17세 해병대원’ 양봉규씨

중공군 ‘피리 공세’ 맞서 ‘피의 능선’ 해병의 피로 지켰다.

  • 기사입력 : 2024-03-06 21: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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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살에 고향 진동서 마산방어전투 목격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해병대 자원입대
    7대 전투였던 파주 장단·사천강지구 참전
    전사한 해병 1822명 중 40%가 이곳서 숨져

    제대 후 택시·중동지역 운전수 등 근무
    현재는 전쟁 유공자 복지 증진에 앞장
    어린시절 지켜봤던 참상 지금도 뚜렷해
    전쟁의 아픔 후손들이 절대 겪지 않기를


    “전쟁이 벌어진 지 2개월 만에 내 고향 마산 진동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왔지. 나라가 공산화될 위기인데 편하게 공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친구들과 자원입대했어. 부모님도 이 사실을 몰랐지.”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가 1952년 9월 해병대 제1전투단 서부전선 분대장으로 참전한 경기도 파주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가 1952년 9월 해병대 제1전투단 서부전선 분대장으로 참전한 경기도 파주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1950년 8월. 15살이었던 양봉규(90)씨는 고향인 진동면에서 마산방어전투 현장을 목격했다. 그가 처음 본 전쟁은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뚜렷하다. 인민군 기습 공격에 죽어가던 처참한 미군의 모습은 15살 소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전쟁을 잊지 않으려고 전투 날짜와 장소를 수첩에 적어 기록했다. 취재진이 질문을 하면 수첩을 찾아 날짜와 장소를 보고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기억에서 잊고 싶을 정도로 참혹했을 수 있지만, 기록 덕분에 ‘역사’를 전할 수 있었다. 6·25전쟁 때는 나라를 구하고, 가난했던 70년대에는 사우디에 노동자로 가 외화를 벌었던 한 가장의 이야기를 그는 들려주었다.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는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전투 날짜와 장소를 수첩에 적어 기록했다./김승권 기자/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는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전투 날짜와 장소를 수첩에 적어 기록했다./김승권 기자/

    ◇부모님 몰래 입대= 6·25전쟁이 터졌을 때 양봉규씨는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수업이 중단되자 그는 고향인 마산 진동으로 돌아왔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미 25사단이 급파됐다. 그는 당시 미군이 주둔 중이었던 진동초등학교 옆에 살았기에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 냈다. “마산과 진해를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미군이 집 옆 진동초에 주둔하고 있었지. 새벽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 일어나니 학교 뒤 산을 통해 인민군이 미군을 기습 공격하는 것을 직접 봤어. 수많은 미군이 다치고 죽는 모습을 눈을 보니 전쟁이 진짜 무섭구나를 느꼈지.”

    이후 전쟁을 피해 피란 생활을 이어가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남쪽 지역이 안정을 되찾자 그는 부산의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그는 1952년 4월 학교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해병대에 자진 입대했다. 당시 학교 선생님들도 제자들에게 자진입대를 많이 권유했다. 그는 입대한다고 고향에 알리면 걱정할 것 같아 부모님 몰래 전쟁에 뛰어들었다.

    “병기병과로 해병대 17기로 입대했지. 진해 해병대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하고, 부산에서 병기 하사관 교육대를 수료했어. 동기가 128명이었는데 나 혼자만 소총수 부대로 가 전선으로 발령이 났지. 당시 소대장님이 나를 아꼈는데 하루라도 늦게 전선에 보내려고 했어. 먼저 가면 빨리 죽는다고. 처음에 어리다고 M1소총을 받았는데 들고 서보니 내 키만 하더군. 결국 자대 배치 후 비교적 작은 카빈소총으로 바꿨지.”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가 1952년 9월 해병대 제1전투단 서부전선 분대장으로 참전한 경기도 파주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양봉규 6·25 참전유공자가 1952년 9월 해병대 제1전투단 서부전선 분대장으로 참전한 경기도 파주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피의 서부전선= 그는 1952년 9월 해병대 제1전투단 소속으로 파주 장단지구(현재 도라산 전망대 인근)에 배치됐다. 그가 참전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해병대 7대 전투로 기록됐을 만큼 치열했고 중요했다.

    장단·사천강지구는 서울까지 거리가 불과 40㎞에 불과했다. 이곳이 뚫리면 다시 서울이 뺏길 수도 있을 정도로 지켜야 했던 요충지였다. 전투는 1952년 3월부터 휴전된 1953년 7월 27일까지 1년 4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쟁 중 전사한 해병대원 1822명 중 40%인 776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전투 당시 분대장을 맡았다. 중공군들은 밤새도록 피리를 불며 국군을 심리적으로 괴롭혔다. 그가 지켰던 ‘노루 고지’는 아군과 적군 수천명이 전사해 그들의 피로 임진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 ‘피의 능선’으로 불렸다. 그의 주된 임무는 노루 고지에서 지원 사격을 하고, 포격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치열한 교전에서 그는 아끼던 부하 2명을 잃는다. 그때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는 말을 머뭇거렸다.

    “중공군들이 지금의 도라산 전망대 쪽으로 우회에서 자주 공격했기에 밤에 정찰을 많이 나갔어. 내 기억에는 그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3번 정도 한 것 같아. 그때 내가 이끄는 분대의 부하 2명이 전사했지. 지금은 그 친구들 이름도 기억도 안 나지만,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

    그는 이곳에서 지난 2월 본지에 보도된 해병대 3기 김종갑씨와도 인연을 맺었다. 같은 건물에서 3개월 정도 근무해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후 다른 부대에 배치됐고,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2003년 6·25참전유공자회 행사에서 우연히 만났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고 울며 포옹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전쟁 당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추위’라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게 힘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괜찮았어. 미군 시레이션(전투식량)과 건빵이 보급돼 그걸 먹었지. 내가 따뜻한 남쪽 마산에 있어서 그런지 서부전선은 너무 추웠어. 손발이 다 터서 피가 날 정도였지. 미 해병대에서 나눠준 털 파카를 입었어도 추위가 심했어.”

    양봉규 6·25참전유공자가 1958년 5월 포항에서 해병대 하사관 특별 교육 수련 후 동기생들과 촬영한 기념사진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양봉규 6·25참전유공자가 1958년 5월 포항에서 해병대 하사관 특별 교육 수련 후 동기생들과 촬영한 기념사진을 바라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1953년 12월 양봉규 6·25참전유공자 부대원들이 받은 대통령 수장 수여증./김승권 기자/
    1953년 12월 양봉규 6·25참전유공자 부대원들이 받은 대통령 수장 수여증./김승권 기자/

    ◇전쟁 영웅에서 산업역군으로= 그는 휴전되는 그날까지 전장에 있었다. 휴전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는 진짜 될지 매우 불안했다. 휴전 서명이 이뤄지고, 중대장이 “오발만 없으면 우린 살아서 집에 간다”고 외치자, 부대원 전원이 만세를 불렀다. 판문점 근처에는 포 사격이 잦았지만, 휴전 이후 한순간 조용해졌다고 그는 떠올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군에 남아 병기 공장에서 근무했다. 이후 1968년 해군 상사로 제대한다. 그는 제대 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어찌 보면 그는 당시 가족과 나라를 위해 땀흘렸던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일 수도 있다.

    휴전 후 양봉규 6·25참전유공자(왼쪽 두 번째)가 행군하는 모습./김승권 기자/
    휴전 후 양봉규 6·25참전유공자(왼쪽 두 번째)가 행군하는 모습./김승권 기자/

    처음에는 택시 기사로 일을 하다 1종 대형면허를 취득해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 트레일러 운전수로 떠났다. “가족들도 먹여 살려야 하고 당시 돈 벌러 중동으로 많이 가니 나도 자격증을 공부해 사우디로 갔지. 터키까지 가는 고속도로를 뚫는 현장에서 일했는데 워낙 더워서 탈도 많이 나고 힘들었어. 그래도 뭐 어쩌나.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는데.”

    사우디에서 귀국 후 그는 한일무역에서 근무했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주택관리사 공부를 해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을 계속했다. 은퇴 이후에는 같이 싸운 전우들을 위해 유공자 복지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정전 70주년이었던 지난해에는 NC다이노스 홈경기에 시구자로 나서 창원시민들에게 많은 환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야구 시구 행사가 특히 기억에 남았는지 그때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전쟁 영웅들이 창원시민들한테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그는 말했다.

    영웅은 본인이 겪은 전쟁 아픔을 후세들이 겪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15살 학생 때 본 죽어가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90살 노병은 잊지 못한다.

    “난 너무 어렸을 때부터 전쟁의 모습을 지켜봐서,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 너무 잘 알아. 몇 년 전 내가 목숨 걸고 싸운 도라산 전망대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몰라보게 변했더군. 그래도 그 장소에 다시 가니 전쟁의 기억이 떠올라 무서웠어. 평화로운 세상이 지속되어 나의 자식들, 손주들이 그 아픔을 겪지 말았으면 해.”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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