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인자 나도 한글 배운다
- 기사입력 : 2018-10-01 18: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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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칠십이 훌쩍 넘도록 글을 몰랐다아이가.
아때 학교를 못 갔거든. 이게 평생 한이 될 줄 몰랐제.
버스도 잘 못 타고 동사무소든, 은행을 가서도 서류 작성이라고 하면 고마 앞이 캄캄했다항께네.
이름 석 자 적는 것이 힘든데 우짤끼고, 내사 마 미치뿌겠더라.
한글을 모른다고 하이 부끄러워서 나이 먹어 눈이 잘 안보인다고 했제.
그런데 아들이 한날 한글 배우는 데 있다고 갈치 주드라고,
그래서 가봤다 아이가 선샘이 가르쳐준다카데 그때부터 한글 배웠제.
인자 이름 석 자는 쓰고, 내 생각도 글로 쓸 수 있다!
좀 늦까이지만 친구랑 선생님들이랑 공부항께네 자랑스럽고 좋다마.
시화도 써 가, 2018전국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도 내고 전시회하고 사람들 앞에서 낭송도 했다아이가.
상 받은 경남 친구들 많다. 우리 시화 쓴 거 좀 볼끼가? 자랑 좀 해도 되것제?
(이 이야기는 2018전국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출품한 경남 문해교육생들의 말씀을 추려 만든 것입니다.)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기말순
김말순(79)·하동군청(늘배움 한글문해교실)농협에 갔다
인자 나도 한글 배운다.
당당하게
이름 석자 썼는데
ㅁ을 빠뜨렸다.
김말순이 그래서
기말순이 됐다.
방학을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썼을텐데
그새 잊어 버렸다.
그래도 한바탕
웃어으니
남은거다.◆잘못탄 차
김순이(75)·하동군청(늘배움 한글문해교실)도부장사 나갔다가
청암차 탄다는 게
수곡차 타고 갔네
캄캄한 밤 걸어가면서
글몰라 당한 일 엄청 울었다네
지금은 글 배워서
내가는 곳 버스
마음 놓고 탄다네◆사인했어요
박영희·성산노인종합복지관바퀴벌레약을 받으러
아파트관리소에 갔다.할머니 여기 사인하세요!
사인이 머꼬?
여기 빈칸에 이름 쓰세요!이름을 써주고
바퀴벌레약을 받아왔다
기분이 좋았다.이름 쓰는 것이 사인인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내 친구
안의중학교 엄순금나에게 친구가 생겼습니다.
내 친구 이름은 암입니다.
혼자 사는 나는 친구랑 밥을 먹습니다.
나도 한 그릇 친구도 한 그릇그 동안 암을 이기려고 계모임도 가고
옷도 사입고 뽄을 냈는데
이제는 친구와 학교에 갑니다.
공부도 하고 시험도 같이 봅니다.
짜게 먹지마라 운동해라 눕지말고 학교가자
친구는 잔소리꾼이지만
공부할 때만큼은 꼭 내 어깨를 두드려줍니다.선생님이 내 아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교가 내 고통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손주보다 학교
윤순녀·민들레노인복지학교화창한 날씨에 내 마음도 들떠
손주들이 보고 싶고
용돈도 주고 싶어
아들네에 가려다가
복지학교로 발길을 돌렸다.복지관 가면
한글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신나는 게 너무 많아
손주 보고 싶은 것도 참는다.오늘은
색종이로 부엉이를 접었다.
나무를 그려 부엉이를 올려놓고
눈도 그려 넣으니 그럴싸하다.손주야
섭섭해 마라
멋진 부엉이 접어서 용돈이랑 같이 줄꾸마
◆송아지
김순달·산청군청음메
음메
소가 운다.
또 운다.
밥 달라고 송아지도 운다.
엄마소 따라 운다.
여물을 한 웅큼 먹으면서도 운다.
그래도 송아지 보면
나는 기분이 좋다.글자를 배워서
송아지 이름도 지어본다.
송아지라고 써 본다.
송아지가 이름이다.
허벌쩍 웃는다.
송아지도 나 따라 웃는다.
송아지야 무럭커라
나는 송아지가 좋다.
◆어깨춤이 절로 나네
심산옥·양산시청(중앙동행정복지센터)시장 가려고 버스를 탈 때
글을 몰라
남이 타니까 타는갑다 하고 탔다.복잡한 버스 안에서
이리 저리 밀리다가
서리를 당해도 그런갑다 했다.엄마, 오늘 또 한 건 했다메
딸들이 놀려도
그런갑다 했다.부모가 다리 밑에 가서 자도
2학년까지만 학교에 보냈어도
좀 나았겠지.글이 그림으로 안 보일 때
글 보고 버스 타고
글 써서 돈도 찾고.이 나이에 글 안다고
벼슬이야 하겠냐마는
글 아니까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네.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슬기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