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 (7) 현재를 위하여- 미드나잇 인 파리
- 기사입력 : 2015-06-03 10: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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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할 때 휴대폰이 꺼질 때가 있다. 몇 주전 퇴근 후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을 때가 그랬다. 전원이 나가는 순간 난감해졌다. 편의점에 가서 충전을 할까 생각했지만 직전 통화에서 "회사 앞 공원에 있을게"라고 말했기에 그냥 공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기다리다보니 점점 초조해졌다. 꺼진 휴대폰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만지작거렸고 몇 번이나 '충전을 해야했는데' 라며 후회했다. 기다리다가 중간에 자리를 뜨지도 못하겠고…. 괜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공원 주변을 돌아다녔다.
15분쯤 지났을까. 공원 앞을 스쳐지나가는 차가 친구의 차인 것 같아 종종 거리며 따라갔는데 아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멀리서 까만 실루엣과 함께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왜 전화를 꺼놨어" "갑자기 꺼졌어. 그래도 뭐 만났네"
친구와 수다를 떨며 가는 동안 문득 휴대폰도 없이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상당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초조해 하던 것도 다 잊어버렸다. 심지어 누군가와 만나려고 휴대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시간, 장소만 정해놓고 기다리고 그런 게 약속의 묘미지' 카카오톡으로 1분 마다 '언제오냐'고 독촉하던 것이 그렇게 팍팍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문득 휴대폰이 없던 시대가 그리워졌다. '아, 아날로그 시대가 좋았지'
나는 8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휴대폰을 쓰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 반에서 절반 이상은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모든 친구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고3때 우리 반에서 휴대폰이 없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 뿐이었다.) 그렇기에 휴대폰이 없던 시대의 감수성은 잘 모른다. 70년대나 80년대의 이야기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접하거나 더 이른 세대(이른바 7080세대)들에게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미디어나 이전 세대들이 말하는 그 시대는 낭만과 예술의 시대였다.
다방에서 DJ가 음악을 틀어주고 서로 손편지를 주고 받던 시절. 박완서와 황석영, 신경림, 조세희 등 유명한 문학가들이 한창 대표작을 내놓던 시절이고 조용필과 이문세 등 지금도 사랑받는 음악가들이 대표곡을 쏟아내던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명작'들과 지금도 리메이크 되는 '명곡'들이 가득하던 시절. 좀 더 빨리 태어났다면 그 시대의 '낭만과 촉촉함'이 있는 삶을 맛볼 수 있었을까.
가구샵에 들린 길과 이네즈. 그의 장모는 18000달러짜리 나무탁자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길에게 '싸구려라 보는 눈이 그렇다'며 그를 무시한다.
길은 이네즈가 바람을 피웠다며 의심한다. 그는 '나는 속여도 헤밍웨이는 못 속인다'며 그녀를 몰아붙이고 결국 자백을 받아낸다.
길을 시간여행으로 안내하는 클래식 푸조.
밤 산책을 하는 길과 아드리아나. 그들은 마차를 타고 함께 1910년대로 가게 된다.
길이 시간여행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난 사람인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
비오는 파리를 좋아하는 여인과 함께 빗속을 걸어가는 길.
과거에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거라는 환상은 현재의 불만에서 온다. 책에서, 혹은 텔레비전에서의 낭만적 재현을 보고, 휴대폰이 없이 누군가를 만났다는 일회성 경험만으로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꿈꾸던 '황금시대'도 현재가 된다면 지루해질 뿐이다. 설령 피카소나 헤밍웨이가 옆에 있다고 해도.?
지루하고 불만족스럽지만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 간단하지만 언제나 놓치게 되는 사소한 진리다. 그래도 이따금씩 현재가 싫어질 때는 다양한 종류의 치킨이나 맥주를 고르는 행복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복이라면 현재를 조금은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간단영화소개>
우디앨런 감독의 2011년 작품. 국내 개봉은 2012년. 도입부에 길게 보여주는 현재의 파리도, 이야기 속 과거의 파리도 모두 매력적인 파리 예찬작. 시간여행에서 등장하는 예술가들을 미리 안다면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파블로 피카소, 어네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장 콕토, 만 레이, 툴루즈 로트렉 등)
타임머신 역할을 하는 '클래식 푸조'가 영화의 마스코트.김세정 기자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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