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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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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4) 합천 묘산 묵와고택과 화양리 소나무

난세의 은신처? 풍수적 이상향?… 조선 사대부 고택이 첩첩산중에

  • 기사입력 : 2024-04-12 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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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지어진 고택은 우아한 선과 기품 있는 조형 속에 반가(班家)의 절제된 언어와 역사의 기록이 담겨 있다.

    경남에는 많은 고택들이 있다. 관영건축이나 불교건축 그리고 향교건축들이 대표적이지만, 주거건축물의 아름다움도 그에 못지않다. 그중 합천의 묵와고택은 특이하게 깊은 산속에 지어졌으며 지근거리의 500년 넘은 소나무와 함께 지극히 한국적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합천 묘산 묵와고택과 육우당이 돌담길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김홍섭 소설가/
    합천 묘산 묵와고택과 육우당이 돌담길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김홍섭 소설가/

    인조 때 ‘영국원종공신’ 봉작된 묵와 윤사성
    합천 깊은 산속 오지에 100여 칸 규모로 지어
    대부분 소실돼 문간채·사랑채·안채 등 남아
    고가 옆엔 경남문화재 제556호 재실 ‘육우당’
    기와·돌담·휘어진 길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

    ◇중요민속자료 제206호 묵와고택

    이 고택은 조선조에 선전관을 지내고 인조 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으로 봉작된 묵와 윤사성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온다. 처음 이 고택을 찾아가면서 이해가 잘 안 되었던 부분은, 명색이 사대부 거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 오지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해발 1000m를 웃도는 두무산과 오도산 등지고 높은 산악지대에 지어졌는데, 교통상으로도 오지이지만 이런 곳에 사대부의 주거지가 지어진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극한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다만 ‘한국의건축문화재 경남편(김영환 지음)’에서는 ‘합천 묘산 묵와고가’를 “현실적으로 임진왜란의 피해를 경험한 후 난세를 피하는 은신처를 구한 의도일 수 있고, 풍수적 이상향을 찾아 산골까지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묵와 윤사성이 창건한 묵와고택 입구.
    조선시대 묵와 윤사성이 창건한 묵와고택 입구.

    갈지자로 구부러지는 좁은 산길을 운전하는데 자꾸 내비게이션에 의심이 간다. 이 골짜기에 정말 사대부의 고택이 있다고? 양반가는 대부분 농사를 짓는 넓은 들이 있고 그것을 경작하는 마을이 있으며 농토와 마을을 관리할 수 있는 입지에 자리 잡는 게 상식이다. 여긴 마을도 없고 첩첩산중 산골. 양반댁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청석골로 임꺽정 인터뷰 가는 기분이다. 지금이야 좁아도 소방도로가 있지만 옛날 윤사성이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청석골 버금갔을 산중이다. 괜히 내비게이션을 가자미눈으로 흘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어느 모퉁이를 돌아드니 멋진 팔작지붕이 확 펼쳐지며 반겨준다. 보고도 처음엔 안 믿겨졌다. 여기 이런 웅장한 한옥이 있는 게 맞나? 하는 마음이다. 워낙 비현실적 풍경이라 영화촬영세트장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에서 내려 찬찬히 둘러보니 거친 비탈에 맞추어 집을 지은 오래된 고택이 맞다. 제대로 찾아온 것에 감사했다.

    묵와고택 사랑채 전경.
    묵와고택 사랑채 전경.

    사대부의 생활주택이지만 워낙 산골이다 보니 가파른 경사를 이용한 건축형식이 오히려 멋스럽고 이색적으로 보인다. 대지를 3단으로 깎아 집을 앉혔다. 맨 아래가 사랑채와 사랑마당이고 그 다음이 안채. 그리고 맨 위에 사당이 자리 잡았다. 원래 집터는 600여 평 정도였고 한때 여덟 채의 건물에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헛간채, 사당채 등이 있다.

    육우당 입구.
    육우당 입구.

    고가 옆 육우당(六友堂) 재실은 경남문화재자료 제556호로 지정되었다. 묵와고택과는 좁은 길 하나 사이에 둔 육우당은 파평 윤씨 종손인 윤석우가 세운 가문의 재실로 묵와의 여섯 아들(炳九, 炳來, 炳殷 ,炳周, 炳斅, 炳旼)의 뜻을 잇기 위한 명분으로 건립되었다. 1960년대까지 서당으로 활용했다. 유림의 거두이자 한학자인 춘산(春山) 이상학(李相學)과 성암(誠菴) 윤석희(尹錫熙)와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 윤중수가 육우당에서 학문을 배웠다. 육우당 건물 배치는 동향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 가구조각이 특이하고 팔작지붕에 납도리집으로 세련된 익공과 활주가 돋보인다. 아랫면을 곡면으로 다듬은 창방을 사용했다. 조선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다.

    ◇윤사성의 고택을 보며 생각하다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선과 묵직한 기품을 유지한 우람한 한옥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뼈대 있는 공신가문의 격을 충분히 느낄 만하다. 이 산속에 이만한 규모의 조선한옥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이유를 떠올려야 했다. 문득 든 생각이 인조반정의 공신 심기원이다. 심기원은 특이한 인물이다.1623년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추대(인조)하여 공신이 된다. 이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나중에는 한 번 맛본 반정의 입맛을 놓지 못하고 인조를 폐위시키려다가 발각 나 죽음을 맞는다.

    솟을대문이 멋스럽게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에 집을 지으려 마음먹었던 윤사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이곳에 지으려고 했을까. 그 의문은 집을 돌아보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내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솟을대문 안쪽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마당보다 높게 대(臺)를 모으고 ㄱ자형 평면의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툭 튀어나온 듯한 4칸 규모의 내루(內樓)는 사랑채를 더욱 멋스러운 풍경으로 만든다. 더구나 사랑채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이 내루만은 팔작지붕이다. 창을 열고 이곳에 앉으면 마치 정자에 앉은 기분일 것 같다.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녹음으로 우거지고 하늘엔 흰구름 떠가며 새들의 소리가 귀를 간질이면 목을 타고 넘는 향기로운 술은 천상의 도화주가 부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로 여기다가 집을 지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도 당당한 공신 윤사성은 어찌하여 이 고립무원의 산속에 집을 지었단 말인가.

    묵와고택과 육우당 사이로 난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면 정갈한 기와와 세월의 더께가 앉은 돌담과 유유히 휘어지는 길이 멋지게 하모니를 이룬다. ‘한국의건축문화재’에서는 이곳을 도가의 은거사상과 풍수적 이상향으로 선정된 입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난세를 피하여 은거하면서도 수신제가로 몸을 닦아 장차 치국(治國)을 준비하는 사대부의 몸가짐이 건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난세를 피하는 은신처’ ‘풍수적 이상향을 찾아’ 같은 기록은 단지 가정일 뿐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중국의 장가계를 생각한다. 유방의 장자방이었던 장량은 자신의 주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공신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을 생각은커녕 유방이 내리는 관직을 모두 마다하다가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전쟁이 끝나면 공신부터 정리하는 중국의 정치적 생리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이 쥐고 있는 권력은 전쟁이 끝나면 역모의 칼이 될 수 있다. 유방의 개국공신 한신 영포 팽월은 이미 죽임을 당했다. 장량은 목숨을 부지했고 후손도 살아남았다. 그의 작은 왕국은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 장가계다.

    합천 묘산 묵와고택 배치도
    합천 묘산 묵와고택 배치도

    묵와고택을 지은 윤사성은 병과에 급제한 무관이다. 왕권이 바뀌면 권력지도가 바뀌고 사람도 바뀐다. 때로는 아주 혹독하게. 반정을 통해 인조를 세웠던 공신 심기원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권력의 정점이었다. 나중 인조와 틀어지자 인조를 축출하고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德仁)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윤사성은 심기원의 모반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공신이 된다. 윤사성은 심기원이라는 인물의 흥망성쇠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공신이면서도 이처럼 깊은 산속에 은둔의 거처를 마련한 윤사성. 인조의 최고공신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최고 극형 거열형을 당한 심기원을 보면서 혹시 장량과 한신의 예를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하늘의 구름이 물음표처럼 휘고 있다.

    화양리 소나무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운데 굵은 줄기 하나는 고사한 것으로 보인다.
    화양리 소나무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운데 굵은 줄기 하나는 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289호 ‘화양리 소나무’
    수령 500년 넘은 우리나라 3대 명품 소나무
    커다란 합죽선 펼친 듯 아름다운 자태 뽐내

    ◇합천 화양리 소나무는 알고 있다

    합천의 북부 묘산면 화양리에는 수령 약 54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가 있다. 높이는 17.7m, 둘레가 6.15m 정도로 천연기념물 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묵와고택과 거리는 3㎞가 채 안되지만 폭이 좁은 소방도로라 운전이 조심스럽다. 화양리 소나무는 우리나라 소나무의 3대 명품 중의 하나로 꼽는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 등기된 자기 땅을 가지고 세금까지 내는 예천 석송령(石松靈), 그리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합천 화양리 소나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화양리 소나무는 마을 아래쪽에 있어서 ‘할매소나무’로 불렸으며, 마을 뒷산에 더 큰 ‘할배소나무’가 있었는데 고사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소나무의 생장모습이 우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잘 가꾼 분재처럼 가지들이 폭넓게 균형감을 가지고 벌어져 커다란 합죽선을 펼쳐놓은 것 같다. 대략 3m 높이쯤에서 줄기가 갈라지는데 갈라진 줄기는 아래로 처질 듯하면서도 중력을 버티고 옆으로 길게 자라 그 자태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다만 가운데 줄기 하나가 고사해서 나목으로 껍질까지 벗겨져 있는 모양이 조금 안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또한 화양리 소나무의 특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줄기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화양리 소나무를 마을 수호목으로 여기고 오랫동안 보호해 왔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소나무 주변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당산제를 올린다.

    소나무는 우리민족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집을 지을 때도 소나무를 사용했고 절구나 디딜방아, 지게 등 생활용품도 소나무로 만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문간에 솔잎가지를 엮은 금줄을 달아 부정을 방지했고 보릿고개에는 소나무껍질을 벗겨 식량을 대신했다. ‘초근목피’는 거기서 나온 말이다. 심지어 ‘밑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소나무껍질의 질긴 섬유질이 소화되지 못해 배변이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화양리 소나무 앞에 서서 역사 한 줄을 생각한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를 옮겨보면, 광해군 5년(1613년)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린다. 3족이 멸하게 될 위기에 김제남의 6촌뻘 되는 김규(金揆)가 용케 달아나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10년만 더 버텼더라면 심기원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었을 것이고 김제남의 3족은 잘 먹고 잘살았을 것이다. 심기원과 윤사성 그리고 김제남까지 물고 물리는 권력무상의 잊힌 기록을 이곳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골에서 다시 읽는다.

    김홍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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