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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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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비 오는 날의 풍경- 김미화(서양화가·수필가)

  • 기사입력 : 2024-01-09 19: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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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밤엔 내내 비가 내렸다. 일정하고 고르게 내리는 빗소리는 한밤의 정적을 뚫고 지나간다.

    오늘 아침은 비처럼 촉촉하고 적요한 분위기로 잠들었던 사물들을 깨우고 모든 움직이는 형상들을 자리에서 일으킨다. 세상의 크고 작은 형상들이 새벽과 함께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며 맨 먼저 새들이 일어나 지저귀고, 그 경쾌함에 아침이 더 분명해진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제법 세차다. 한겨울에 비 내리니 겨울비겠다. 한밤이 춥고 무서워 오들오들 떨며 내렸을 듯싶다. 눈이라도 하얗게 내렸으면 겨울의 정취를 더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내리는 빗소리는 왜 이렇게 마음을 끄는지 참 모를 일이다.

    창밖에 비 내리고 그 빗소리 아득하니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커피 향에 젖어 드는 마음은 창밖 풍경을 닮아가고 잔을 감싼 손끝이 따뜻해진다. 빗소리는 커피 향만큼 짙은 음색으로 마음을 파고들며 흔들어댄다.

    짙게 내려앉은 회색 하늘, 희부연 안개에 싸여있는 먼 산, 촉촉하게 젖어있는 잔디와 함께 회갈색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흔들림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다. 마치 봄을 기다리며 서 있는 비장함이 서린 듯….

    문득 밖으로 나가 저들 속으로 들어가면 나도 하나의 풍경이지 싶다. 얼른 일어나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제일 큰 우산을 챙겨 들고 대문 밖을 나선다.

    작은 물웅덩이 튕기는 빗방울이 그려낸 수많은 파문들이 음률처럼 번진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콘트라베이스의 현을 닮은 듯하다. 거세게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는 마치 폭포수처럼 귓전을 울리고, 그 미묘한 진동은 내부로 흘러들어 고독한 영혼에 파문을 일으킨다.

    바람과 비의 장단에 맞춰 늘 걷던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다. 까치 두 마리가 나를 보자 낮게 날아오른다. 오늘 아침 새들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아침을 맞이하고 또 높이 날아오른다.

    저 앞에 빨간 우산을 쓰고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빨간 털모자와 빨간 우산을 쓴 중년의 여인은 밤새 빗소리 들었을까, 밤새 빗소리 들으며 아침을 기다렸을까.

    우리는 나무들 사이로 가로누운 언덕길을 따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걷는다. 앞서가는 여인은 겨울비를 따라 들어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녀의 빨간색 우산은 회갈색 공원의 꽃이 되었고 무겁게 젖어있던 공원에 생기가 돈다. 매일 보던 이 공원이 오늘 참 예쁘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빗방울에 동그란 고드름, 밤새 추웠나 보다. 그래도 숲은 생기에 넘치고 나무는 자욱한 안개 사이로 서 있다. 희뿌연 안개는 산등성이를 타고 대기로 피어오르며 하늘의 구름과 맞닿아 있다. 구름은 낮게 내려와 비를 내리며 이 산의 나무들과 봄에 피어날 풀잎들과 꽃들을 위해 대지를 적시며 부드럽게 스며든다.

    오늘 아침 길을 걸으며 익숙한 것들 속에서 다시 보는 것들과, 눈여겨보는 것들과, 멀고 가까운 풍경들을 보면서 마치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 아름다운 계절 속으로 빠져든다.

    김미화(서양화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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