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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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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유산 읽기] (1) 함안 ‘무진정’

정쟁을 등지고 만든 정자… 역사와 자연이 만나다

  • 기사입력 : 2023-12-14 21:06:12
  •   
  • 조선 정치 폐단 질려 낙향한 조삼 선생
    1542년 인재 양성 위해 ‘무진정’ 지어

    ‘생육신’ 조부 조려 선생 DNA 물려받아
    성균관 생원 때 ‘유자광 처벌’ 상소 올려

    재실 괴산재·누각 영송루 자연과 조화
    수려한 자태 연못 5·10월 낙화놀이 명소



    신문사로부터 문화유산 답사 취재를 제의 받고 난감했다. 요즘 누가 역사기록을 읽는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역사전문가도 학자도 아니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 제일 기피했던 과목이었다. 눈치 챈 데스크가 말했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독자가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 지역 문화유산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게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우리 문화유산이 만들어질 시기에 이웃나라나 먼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병행서술해서 재미를 입혀 보기로 했다. 아울러 우리의 문화재가 만들어지던 동시대 세계 문화사나 과학사 그리고 개척사나 탐험사까지 단신박스로 넣어 교양군것질거리로 삼아 볼 생각이다. 꼭지 제목 그대로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유산 읽기’가 될 것 같다.

    조삼 선생이 고향인 함안으로 돌아와 1542년 지은 무진정. 이곳은 후진을 양성하며 기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무진정 모습은 임진왜란 때 처참하게 불타 버린 것을 1929년 그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김홍섭 소설가/
    조삼 선생이 고향인 함안으로 돌아와 1542년 지은 무진정. 이곳은 후진을 양성하며 기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무진정 모습은 임진왜란 때 처참하게 불타 버린 것을 1929년 그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김홍섭 소설가/

    무진 조삼 선생(1473~1544)이 중앙정계에서 등 돌리고 낙향하여 한 몸 거처할 정자를 지을 무렵 조선의 사회 정치 상황은 사림(士林)과 훈구(勳舊)로 나뉘어 수시로 부딪치며 시끄러웠다. 작은 조선 땅 밖은 더 시끄러웠다. 1521년 에스파냐의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으로 번영하던 아즈텍제국이 무너졌다. 아즈텍 인구는 수백만이었고, 침략군은 600명에 불과했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즈음 외부와 교역을 시작한 일본은 포루투갈 상인들로부터 처음 조총이라는 희한하게 생긴 무기를 손에 넣는다. 창보다 훨씬 짧은 막대기에서 고막을 때리는 소리가 나면 불이 튀어나가고 사람이 쓰러지는 무기. 그리고 멀리 남아시아에서는 전설적 황제 악바르가 이슬람과 힌두교로 나뉘어 치고받던 인도 대부분을 통일하며 거대한 무굴제국을 세우고 있었다. 조삼 선생이 태어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기 지구는 제국주의자들의 땅따먹기와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다.


    차를 몰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번지 무진정을 간다. 마산대학교를 지나 15분, 함안천을 넘어 79번 국도를 갈아타고 우회전한 뒤 2㎞쯤, 무진정의 입구에 차를 세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지정: 1976.12.20). 무진정 앞 주차장은 넓었고 제법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다. 무진정 연못은 그 자체로도 경관이 워낙 수려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5월과 10월에는 전통낙화놀이를 하는데, 야간에 불빛이 하늘을 덮고 연못에 반사되며 떨어지는 이 축제는 워낙 볼거리가 넘쳐 전국에서 관광객이 모이기 때문에 주차장이 넓다. 물론 축제 때는 이마저도 부족하지만.

    주차장 옆 푸른 연못이 예사롭지 않다. 그저 밋밋한 저수지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연못의 테두리는 여인의 한복 치맛자락이 가볍게 바람에 일렁이듯, 굽이치며 휘어진다. 그 모양이 자못 우아하다.

    12월, 평일 낮의 무진정 연못 주변은 사람이 별로 없어 고즈넉하지만 그래서 오롯이 혼자만의 연못으로 즐길 수 있어 좋다. 휘어지는 연못 주변 산책길을 따라 비어 있는 벤치들. 휴일이면 가족이나 연인들이 차지했을 테지만 지금은 떨어진 나뭇잎들의 놀이터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무진정 연못. 이곳에는 오는 손님 맞고 가는 손님 배웅했던 누각 영송루(迎送樓)가 그림처럼 떠 있다./김홍섭 소설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무진정 연못. 이곳에는 오는 손님 맞고 가는 손님 배웅했던 누각 영송루(迎送樓)가 그림처럼 떠 있다./김홍섭 소설가/

    연못 한가운데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위에 정자가 그림처럼 떠 있다. 영송루(迎送樓). 연못 한가운데에 이처럼 그림 같은 정자를 짓고 오는 손님 반가이 맞아들이고 가는 손님 아쉬움으로 배웅했다니 신선의 세계가 따로 없다. 다리를 가로질러 영송루에 닿으니 발아래 고운 물빛이 정자의 그림자를 비춘다. 이어 바람이 살짝 불자 물살이 가볍게 밀리면서 정자는 한 척의 아름다운 배가 되어 천상의 호수를 지나는 것 같다. 마음이 통하는 벗과 함께 이곳에서 종일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세상살이 등지고 자연과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한 달만 지내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조삼 선생이 이곳에 정자를 지을 때 원했던 것이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조선 정계는 사림과 훈구의 피 튀기는 싸움으로 백성들이 피로에 지쳐가는 중이었다.

    연못 중앙 영송루로 가는 다리.
    연못 중앙 영송루로 가는 다리.

    무진정은 중앙정치의 폐단에 질린 조삼 선생이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기거하던 곳이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에 불과할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라는 당찬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이다. 그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것이다.

    연못을 반 바퀴 돌아 낮은 언덕의 오르막 돌계단 몇 개 따라 올라 동정문(動靜門)을 지나면 무진정(無盡亭)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이 툇마루다. 마루방과 툇마루 사이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한다. 들문을 올리면 사방이 눈에 든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문을 내리면 혼자 글 읽기 좋을 만한 공간, 문을 들어 올리면 산과 나무, 하늘과 호수, 사위의 풍경이 와르르 쏟아들며 좁아보이던 공간은 드넓은 자연의 중심이 된다. 무진정 언덕 아래에는 괴산재(槐山齋)가 있다. 이곳은 함안 조씨 집의공파 무진 조삼선생 재실(齋室)이다. 조삼 선생 생전에는 지방 인재들을 모아 공부하던 성리학 아카데미였다고 보아 무방하다. 무진정 마당에는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이 지었다는 무진정 기문(記文)이 있다.

    함안 조씨 집의공파 무진 조삼 선생 재실 .
    함안 조씨 집의공파 무진 조삼 선생 재실 .

    1542년 조삼 선생이 무진정을 짓고 은거할 무렵,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입수한 조총을 분해하여 제작방법에 몰두할 때다. 마침내 조총 제작에 성공한 일본은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보다 더 많은 소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국주의의 꿈을 꾸기 시작할 때다.

    그러나 그 시기 조선은 정쟁으로 참혹했다. 조삼 선생의 생존기인 1473~1544년 사이에 두 개의 사화가 있었다. 갑자사화와 기묘사화다. 이 두 사화는 조선의 4대 사화 중 두 개에 해당한다.

    1504년 발발한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불을 당겼다. 국고가 바닥나니 연산군은 공신들의 재산을 빼앗아 보충하려고 했다. 연산군에 붙어 권력을 넘보던 임사홍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 연유를 연산군에게 고해바쳤고, 격노한 연산군은 궁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후궁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사약을 내리는데 동조했던 김굉필 윤필상 같은 신하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화로 성종 때 공을 세운 사대부들이 대거 죽어나면서 임사홍 등이 권세를 잡는다.

    그리고 2년 뒤인 1506년, 기득권을 잃고 불만을 품게 된 훈구파들이 임사홍을 비롯한 연산군 측근 세력을 죽이고, 경복궁에 들어가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중종을 옹립한다. 중종반정이다.

    1519년 기묘사화는 1518년 대사헌에 임명되어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조광조 등 사림이 훈구 세력의 반격을 받아 죽거나 귀양 가는 참변을 당했다. 조광조는 1518년 대사헌에 임명돼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림은 성리학을 공부하며 사회를 성리학의 가르침대로 바꾸려 했다. 계유정난과 왕자의 난을 통해 공을 세우고 중앙정계를 장악한 훈구파에게 사림은 눈엣가시였다. 그 임계점이 1519년 위훈삭제 사건이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 중 76명의 공훈이 잘못된 것이니 삭제하자는 것. 이건 중종반정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는 일이었고 당연히 중종도 조광조에게 등을 돌린다. 결국 사림의 많은 선비가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고 조광조도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아든다.

    그즈음 유럽은 종교문제로 시끄러웠다. 종교라지만 사실은 속세권력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이라는 걸 발표한다. 그때는 교황 레오 10세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을 건축하는데 자금이 부족했다. 건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대량으로 팔았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은 바로 그 문제를 지적한다. 당시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여차하면 화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지만 이 반박문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결국 종교개혁에 불을 지핀 동기가 되었다. 중세의 가톨릭 권위에 도전한 이 운동은 이후 100여년에 걸쳐서 신교와 구교의 싸움을 통해 유럽의 정치문화와 권력지도를 바꾸어놓는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던 해 조삼 선생이 세상을 뜬다. 그가 기거하던 무진정은 1567년 그의 자손들이 다시 짓는다. 그즈음인 1556년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을 세운 악바르가 3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내고 황제로 등극한다. 제국을 이룬 동력은 화합과 포용이었다. 악바르는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교와 파시교도 그리스교도까지 포용하고 평등하게 받아들였다. 그 시기 조선은 사림과 훈구로 나뉘어 서로 피 튀기는 살육전을 끝도 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제국주의에 눈을 뜬 일본으로서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임진왜란은 출중한 장수들이 있어 막아냈지만 결국 19세기 들면서 우리는 나라를 잃는 비극을 맞는다. 조선의 사림과 훈구의 피투성이 싸움은 현대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이전투구와 판박이다. 조삼 선생이 무덤에서 21세기 조국을 봤다면 다시 낙향해 저승에 무진정을 짓지 않았을까.

    기묘사화 후 불과 14년 후인 1532년 에스파냐의 군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달랑 180명의 부하를 이끌고 가서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기습해 사로잡았다. 어마어마한 금을 챙겨 개선하는 피사로를 보고 라틴아메리카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금에 눈먼 원정대들이 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수도 없이 몰려들었고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나라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무진정 앞에 서면 그 분명한 교훈이 폐부를 찌른다. 지금의 무진정 모습은 임진왜란 때 처참하게 불타버린 것을 1929년 그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바람이 분다. 고목에서 떨어진 나뭇잎 하나, 바람 등에 업고 고요한 연못 위를 저 홀로 떠가고 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 세기의 걸작 모나리자의 탄생

    1506년, 지구의 한쪽 귀퉁이 한 점 땅 조선에서는 중종반정으로 살기등등하던 그해, 서방에서는 인류지능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마침내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완성하는 해였다. 모나리자는 ‘리자 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림 속의 여인은 피렌체의 부유한 비단 장수인 조콘도의 아내로 본래 이름은 리자 게라르디니다. 모나리자는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내내 다 빈치는 가수와 연주자를 불러 연주를 했는데, 그녀가 항상 미소를 짓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 빈치는 이 그림을 4년 넘게 그렸는데, 눈썹이 없어서일까. 완성작이라는 말과 미완성작이라는 견해가 공존한다. 수수한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신비롭다. 이 초상화는 여인의 눈썹이 없다. 그 이유는 당시에 넓은 이마가 미인으로 여겨져서 여성들이 눈썹 뽑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원래 눈썹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지워졌다는 설도 있다,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특수 카메라렌즈로 촬영한 결과 수백 년이 흐르면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졌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지만 눈썹이 없는 이유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분명한 것은 현존하는 미술품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값비싼 그림이라는 것이다.

    # 코페르니쿠스, 유럽을 뒤집다

    1544년 조선 12대 인종이 즉위하고 무진 조삼선생이 세상을 뜬다. 그 한 해 전인 1543년은 일본이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무기, 조총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실제로 경천동지할 이론이 유럽을 흔드는데,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천체를 관측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펴낸 것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가르쳤던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탄압으로 자신의 경력과 생명을 하루아침에 지울 수도 있는 대담하고도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150년 뒤, 조선에서는 당시 예수회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아담 샬과 함께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부 자코모 로(Giacomo Rho)의 ‘오위역지(五緯曆指)’에 소개된 서양의 천체관을 공부하고 이를 성리학에 접목했던 통천군수 김석문이 1697년 저술한 책 ‘역학이십사도총해(易學二十四圖總解)’에서 ‘지전설(지구자전)’이 학문적 이론으로 제기되었다. 이후 17세기 중반 홍대용은 〈의산문답 山問答〉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돈다는 독창적인 지전설을 주장했다. 그는 실옹(實翁)과 허자(虛子)의 문답형식을 빌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이 책에서 “땅덩어리는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 땅의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간(子時에서 亥時)이다. 9만 리의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라고 하여 지구 자전을 주장하고 있다.

    김홍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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