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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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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기획자 : 예술과 행정 사이의 경계인간- 이수진(3·15아트센터 문예사업부 과장)

  • 기사입력 : 2023-10-25 19: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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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A지역의 미술관으로 업무차 답사를 간 적이 있다. 임원급 부서장이 직접 나와 미술관 투어를 시켜주는 일이 흔하지 않기에 고맙기도 했고 사실 좀 의외였다. 찬찬히 미술관을 둘러보고는 국내외 예술 교류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공간의 숙소에 이르렀다. 방 한쪽에 실용가구가 아닌 고미술품이 옷장으로 비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재단법인에 소속되어 있는 나로서는 A 미술관 역시 공공기관이라 자산비품을 고미술품으로 구입하는 절차가 꽤나 까다로울 텐데 경영팀을 어떻게 설득했을지 궁금해졌다. “고미술품이 옷장으로 쓰인다니 대단한데요, 구매가 가능해요?” “그럼요, 미술관이니까요.” 그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문현답에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부서장에게서 느껴지는 미술관에 대한 자부심, 그 단단한 아우라에 대한 부러움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당연한 건데.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직(職)이자 업(業)이건만 예술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다니.

    한번은 B지역의 미술관에서 일하시는 큐레이터가 고충을 토로하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출 담당관이 기획전시마다 전시실에 페인트칠을 왜 매번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페인트칠 그거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림이야 그냥 벽에 걸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 큐레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한 편의 기획전시 준비를 위해,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경영부서와 결재라인을 설득하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을 시민들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우리, ‘기획자’들은 마음의 안팎으로 지난한 싸움을 해내야 할 때가 있다. 예술인들만이 쓰는 언어를 완벽히 습득하여 이들의 예술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행정가들에게 통역하고, 또 한편,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가장 쉬운 언어로 통역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술가도 행정가도 아닌 이 경계인간들이 더 많아지고, 부디 오래오래 힘을 내길 바란다. 우리가 어제도 오늘도 그랬듯 내일도 열심히 이 노력을 이어간다면 A 미술관처럼 행복한 순간들도 찾아오지 않을까. 예술을 오롯이 존중할 수 있는, 모욕하지 않아도 되는 단단한 순간들이 말이다.

    이수진(3·15아트센터 문예사업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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