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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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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알파벳 A처럼- 김종열(전 농협 밀양시지부장·시인)

  • 기사입력 : 2023-08-23 19: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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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가끔은 기록을 이기는 기억도 있다. 뇌리에 깊이 박히는 결정적인 순간,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영광스러운 순간, 반대로 잊고 싶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불편한 순간 등. 그리고 불편하게도 불편한 기억이 오랫동안 남는다. 불편하게시리.

    중학교 국어 시간이다. 교과는 시였다. 불완전한 기억이지만 시는 이렇게 시작됐다. ‘오늘 아침은 추웠어요. 밖에 나갔다 온 동생이 그랬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이 구절이 눈에 걸리는 것이었다. 추웠다는 첫 행은 화자가 느낀 것인데, 추웠다는 사실은 동생이 알려줬다는 것이다. 올바른 표현이 아닌 듯하다. 직접적인 표현과 간접적인 표현이 혼재돼 있다. 사춘기여서일까? 아니면 어쭙잖은 영웅심리였을까? 손을 들고 선생님께 질문을 한다. 그리고 불행은 시작됐다.

    이런저런 사유로 나름 친하게 지내던 국어 선생님이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어린 느낌에도 중언부언, 흐지부지한 대답이다. 질문을 그만두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 무섭다는 중2쯤이었고, 그만두기보다는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니 불행은 예정된 순서였다. 꽤 긴 시간 동안 꽤 많은 손찌검이 계속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아픔과 상처는 기록보다 강한 기억으로 남았고, 어쩌면 그 트라우마는 나서지 말자는 소극적인 성격을, 한 명의 소년에게 남겨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문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시로써 전달할 땐 그럴 수도 있다. 정도의 대답만이었어도 충분했을 텐데….

    ‘사랑의 매’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의 얘기다. 그런데 그 먼 옛날만 그랬을까? 불행히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에 진심이었다. 특히 아들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높았었다. 그리고 그 높았던 신뢰만큼 큰 상처를 안게 되는데, 그건 어느새 다 커버린 아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 말이 상처로 남는 아무런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복도를 뛰다가 그랬다던가? 어쨌든 지극히 사소한 일을 빌미로 담임에게 뺨을 수십 대나 맞았다. 그런데 아들의 어린 마음에도 사소한 잘못과는 상관없는 느낌을 받았다는 거다. 어른이 된 아들은 아무렇지 않다고 했지만, 기록을 이기는 기억을 하고 있다는 건 상처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 얘기를 듣게 된 아내의 가슴에도 때늦은 생채기를 남기게 됐고.

    한 교사의 죽음으로 교권과 학생 인권이 이슈다. 어느새 자란 학생 인권이 학생과 학부모의 갑질로 이어진다고 한다. 교권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고도 한다. 일부의 얘기였으면 좋겠고, 일부의 얘기여야만 하고, 일부의 얘기라고 믿고 싶다. 그 옛날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던 일부의 갑질처럼 말이다. 알파벳 A는 균형 잡힌 글자이다.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힘의 균형을 잡고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획이 균형 잡힘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교권과 학생 인권의 ‘권’이, 갑질을 일삼는 잘못된 권력이 아니라 합당한 권리로 작용하는 균형을 이뤘으면 좋겠다. 알파벳 A처럼.

    김종열(전 농협 밀양시지부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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