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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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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봄편지-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 기사입력 : 2023-04-03 19: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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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두고 간 오래된 거리에는 어김없이 봄꽃이 피어납니다. 고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사람들은 모두 꽃 아래에서는 하얗게 웃습니다. 나도 덩달아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며 한참을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사과즙처럼 상큼한 향기가 맴돕니다. 아무런 약속이 없어도 계절은 또 꽃피는 봄날입니다.

    이젠 당신이 떠난 지 몇 해가 되었는지도 가물가물합니다. 그저 강물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흘러오듯이 말입니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지나서, 변함없는 사무실에 앉아, 별 특별하지 않은 업무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나도 흘러가면 저 꽃들은 또 피었다 지고, 이 거리는 조금 더 오래되겠지요.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또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며 이 자리에 앉아 꽃비를 맞겠지요. 머지않아 사라질 노래를 들으며, 봄바람 타고 어디로 흘러가면 그곳에서 혹시 당신이 마중 나와 있을까요? 까치발을 하고 손나팔로 목메어 부르고 있는데 정작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조금 다행인 것은 세상 바라보는 눈은 서툴고 희미하지만, 달콤한 말보다는 진중하고 좋은 말을 알아들으려 애쓰는 두 귀는 멀쩡합니다.

    어제는 추운 겨울 다 지났다며 근 일 년 만에 딸아이가 고향에 왔습니다. 만만찮은 서울 생활에 살이 많이 빠져 보였어요. 일부러 살을 뺀 것 같지는 않고, 꿈엔들 결혼할 생각은 없답니다. 여전히 벚꽃 같은 연분홍 피부가 조금은 안심되긴 했습니다. 나와는 다르게 하루하루가 급변하는 일상을 견뎌내는 게 신기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자식을 보면 늘 그러하지요?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어서 항상 미안하고, 더 줄 게 없어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 아름다운 눈을 오래 쳐다보지도 못하는 게 부모 마음이지요? 그래서 잠들었을 때야 얼굴을 쓰다듬고 머릿결을 오래오래 만져보는 것 맞지요? 당신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다가 지난 내 생일을 맞아 살구나무를 심었습니다. 당신의 속옷처럼 붉은 꽃망울이 여럿 달린 제법 키 큰 어린나무였는데요, 올가을에는 살구가 열릴 수도 있답니다. 장마철이 지나고, 몇 번의 태풍을 견뎌내며, 범람하는 강물을 지켜보는 저녁들이 흘러가면 알알이 맺힐 열매가 벌써 보고 싶어집니다. 우물 가서 숭늉 찾으라고요? 후후후.

    물론 그 열매가 열기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동안에 나도 함께 자라야 한다. 맹탕 소비적인 시간을 아껴서 정성스레 넘치지 않게 물을 준다. 피해도 되는 저녁 자리를 굳이 찾아다니며, 견딜 수 있는 주량을 넘는 날을 줄여서 무슨 병이라도 앓는지 꼼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무와 오래 대화할 것! 너는 심었으니 당연히 자라서 열매를 맺으라 하면 그건 폭력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 알고 있는 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벌써 나무 심은 것을 후회하는 내 표정이 읽혔나 봅니다.

    두서없이 봄 편지랍시고 몇 자 끼적거려 보았습니다. 어느 시인이 그랬지요.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고. 그래요.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으면 자꾸 오는 옛 기억을 어쩌겠어요. 당신을 그리는 나도 이제 자꾸 기억이 몰려옵니다. 앞날에 다가올 기억들. 그 불안과 조바심이 지금의 나를 무척 고단하게 합니다. 더 이상 나눌 게 없는 텅 빈 곳간을 쳐다보는 날들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축복처럼 꽃비가 내립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나에게 펼쳐진 오래된 거리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늘 그림자로 있던 당신이 오늘은 내 손을 꼭 잡아줍니다. 우리는 나란히 어깨동무합니다. 강변을 달리는 은빛 자전거가 눈부십니다. 그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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