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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1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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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④ ‘수색대’ 임채석씨

조명탄에 달려오던 적군 생생… 전우 50명으로 ‘니키고지’ 탈환

  • 기사입력 : 2024-02-21 20:3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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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전쟁에 참전하라고 하면 난 못 하겠어. 전쟁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야. 운 좋게 살아 왔는데 다시 그 지옥으로 갈 용기가 솔직히 없어.”

    올해 96세인 임채석씨는 고령인 탓에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기억도 예전만큼 정확하지 않다. 청력이 약한 탓에 취재진은 수첩에 질문을 적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질문을 보면 눈을 감고 천천히 기억을 끄집어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그는 전쟁 영웅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솔직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 줬다. 그의 증언에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70년이 훌쩍 넘은 과거라 그는 잊었다고 말했지만, 기억을 더듬으며 죽을 뻔했던 전쟁 경험을 들려줬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참전유공자의 귀가 어두워 박준혁 기자가 수첩에 글을 적어 질문을 하는 모습./김승권 기자/
    임채석 참전유공자의 귀가 어두워 박준혁 기자가 수첩에 글을 적어 질문을 하는 모습./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귀가 어두워 박준혁 기자와 수첩에 글을 적어 질문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귀가 어두워 박준혁 기자와 수첩에 글을 적어 질문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입영 영장 받고 23살에 입대
    제주도서 강도높은 훈련받고
    경기도 1사단 수색중대 배치
    후방 침투, 정찰·감시 맡아

    ◇늦은 나이에 입대= 의령 출신인 임채석씨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3살에 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에 들어간 1952년 6월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을 때다.

    그는 사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입영 영장을 받았기에 전쟁에 뛰어들었다. 늦은 나이에 군에 간 것도 자원입대를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유공자회 관계자는 설명했다. 어찌 보면 그는 지극히 평범한 당시 청년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는 입대 후 제주도에서 훈련소 생활을 했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제주에는 육군 제1훈련소가 운영돼 50만 장병이 육성됐다. 전쟁이 길어지자, 사상자가 늘면서 제1훈련소 훈련 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짧은 기간에 병사를 육성해야 하니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빗물이 고이지 않고 땅속으로 흡수되어 물이 항상 부족했다. 비바람이 심하다 보니 물자 수송도 늦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훈련병들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했다.

    그는 훈련 기간이 끝난 뒤 전방인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에 배치된다. 그는 적의 후방에 침투하고, 정찰·감시를 하는 등 특수 작전의 임무를 맡았다.

    “늦은 나이에 영장 받고 입대하니 주변 전우들이 나보다 다 어리더군. 모진 훈련 후 배치받은 연천은 그야말로 ‘피바다’였어. 한탄강 쪽에 죽은 전우와 인민군 시체가 널려 있었어. 나이가 100살에 가까우니 그때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참혹했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해.”


    요충지였던 연천 ‘니키고지’
    한밤 적 공격에 목숨 건 탈출
    치열한 교전 끝 다시 되찾아
    70년 지나도 암호명 또렷해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목숨 잃을 뻔한 탈출 작전= 연천은 전쟁 당시 16개 UN참전국 군대가 모두 전투를 치렀던 유일한 지역이었을 정도로 치열하고 참혹했다. 연천군 내 UN 참전국 주요 전투는 △1951년 4월 장승천 전투(터키) △1952년 10월 고왕산 전투(캐나다) △1952년 11월 폭찹고지 전투(태국), △1953년 3월 불모고지 전투(콜롬비아) 등이 있다. 연천에는 유엔군 전사자들을 위한 화장장이 마련됐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1952년 10월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이 포로교환 문제로 교착 상태에 이르자 인민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10월 6일 중부전선인 백마고지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해 1사단 15연대가 전진거점으로 삼은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에서도 전투가 개시됐다. 니키고지는 적진을 향해 돌출되어 있어 인민군이 뺏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씨는 고지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 태세에 임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밤 11시쯤 인민군과 중공군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중공군은 멀리 던질 수 있게 손잡이를 붙인 ‘방망이 수류탄’을 투척하며 고지를 습격했다. 끝도 없는 적의 공격에 그는 퇴각해 고지 정상의 소대 작전본부에 들어갔지만, 이미 소대장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인민군, 중공군들이 고지를 향해 달려올 때 정말 무서웠어. 조명탄이 터지자, 안 보이던 적들이 달려오는 걸 봤지. 총 끝이 벌게질 정도로 M1소총을 쐈어. 전우 상태를 확인하려고 옆을 보니 어깨너머로 인민군이 참호를 넘어가고 있었지.”

    고지 대부분이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국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 고지에서 움츠린 채 굴러서 내려왔다. 정신을 잃던 차에 고지를 올라왔던 길로 퇴각하면 적에 들킬 수 있다고 생각해 하천에 몸을 숨긴 채 이동했다.

    아군 진지로 가기 전까지 세 번 검문을 받았다. 70여년이 흘렀지만, 그는 당시 암호명인 ‘버들피리’를 기억해 냈다. 그렇게 해서 살아 돌아온 수색 중대는 50여명 남짓. 고지를 지키고 있던 120명 중 절반 넘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진지에 도착하니 중대장이 권총을 들고 이렇게 소리치더군. ‘너희들 전우들이 다 죽었는데 너희만 살았냐. 내 총에 죽기 싫으면 다시 고지를 빼앗아라.’ 그렇게 해서 다시 50명으로 고지를 공격했지. 고지로 올라가는 길에 전우들 시체가 널렸어. 멀쩡히 죽은 시체가 하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교전 끝에 다시 점령할 수 있었지.”

    고지를 점령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한 전투를 치렀다. 연천 지역은 한 고지를 점령하면 다른 고지가 뺏기고 다시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본인이 죽을 뻔했던 이름 모를 고지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그는 정확한 지명을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1953년 휴전소식 듣고 귀향
    은퇴 후 유공자회 적극 활동
    “전우 시신 너무 많이 목격해
    전쟁 안일어나는 것이 소원”

    임채석 참전유공자가 제대증을 보여준 후 지갑에 넣고 있다.
    임채석 참전유공자가 제대증을 보여준 후 지갑에 넣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의 제대증./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의 제대증./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의 제대증./김승권 기자/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의 제대증./김승권 기자/

    ◇다시는 전쟁 없어야= 휴전이 된 1953년 7월 27일 그는 강원도 홍천에 있었다. 소대장으로부터 휴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크게 다친 데 없이 팔다리 멀쩡히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지. 전우들이 다들 환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네.”

    제대 후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녀 세 명을 키웠다. 은퇴 이후에는 6·25참전유공자회에서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령에도 혼자 버스를 타고 유공자회 행사에 꼭 참석한다.

    만약 1950년으로 돌아간다면 전쟁에 참전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전장 속에서 너무나 많은 전우의 시신을 봤어. 다시는 그 끔찍한 모습을 보기 싫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잘 알아. 부끄럽지만, 다시 총을 들지 못할 것 같아.”

    그는 정부의 보훈 정책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좋아”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아픈 아내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기에 혼자 생활하고 있다. 경남동부보훈지청 재가보훈실무관이 그의 집에 방문해 각종 살림을 돕고 있다. 이를 비롯한 정부 보훈 정책에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채석 6·25 참전유공자가 경기도 연천의 1사단 15연대 수색 중대원으로 참전해 서부전선 북단 ‘니키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70여 년이 흐른 탓에 그는 정확한 지명이나 전투 연도를 잘 기억하지는 못했다. 6·25참전유공자회 관계자가 설명을 해주었기에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인터뷰 말미에 목소리가 정확해지고, 당시의 기억을 취재진에게 다시 차례대로 말해줬다.

    “죽기 직전에 그때의 기억들이 다 떠오르겠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도 들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전쟁을 앞으로 안 해줬으면 해. 민족의 비극? 자유 민주주의? 공산주의? 난 그런 거 잘 몰라. 전쟁하면 너무나 많이 죽어. 이런 전쟁이 앞으로 안 일어나길 바라는 게 96세 노인의 소원이야.”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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