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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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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② ‘백마고지 전투 참전’ 정창섭씨

“딱 소리는 죽은 거, 딱꽁 소리는 산 거… 끝없는 중공군 무서워”

  • 기사입력 : 2024-01-25 0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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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마고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냐면 너무 많이 죽어서 옆 전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전사’ 소식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죽었다고 해도 별 감정이 안 생기더군.”

    전쟁은 국가뿐만 아니라 한 사람 인생도 바꿔 놓는다. 10대에 전쟁에 참전한 어린 군인들은 7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나도 그날 고통을 기억한다. 정식으로 육군이 창설되기 전부터 나라를 지킨 소년은 이제 90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전쟁을 말할 때는 현역 군인이다. 소년은 경상도에서 북한까지 6·25전쟁 내내 한반도를 누볐다. 이제는 94세 노인이 된 6·25 참전영웅 정창섭씨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들려주었다.

    정창섭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1948년 초등학교 졸업 후 배고픔 없애려
    육군 전신 국방경비대 입대해 공비 소탕
    6·25전쟁 터져 인민군·중공군과 교전 치열

    ◇배고픔 해결을 위해 입대= 해방 이후 194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창섭(94)씨는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밥을 굶는 건 일상이었다. 군대에 가면 밥이라도 제대로 먹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산에서 국방경비대에 입대한다. 육군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광복 후 1946년 미군정하에 창설된 군사 조직이다.

    입대 후 그는 2년 동안 영남 지역의 공비 소탕 작전에 투입됐다. 해방 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남한은 극심한 좌우 대립이 있었다. 일부 좌익 세력들은 미군정 철폐와 친일파 처벌을 요구하며 관공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미군정도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쳐 좌익 세력은 산에 숨어 생활하기도 했다. 이 사이 죄 없는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6·25전쟁중 총탄을 맞아 생긴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6·25전쟁중 총탄을 맞아 생긴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김승권 기자/

    “다들 힘든 생활을 하다 보니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들이 모두 평등하게 잘살 수 있다고 현혹을 많이 했지. 전국 곳곳에 무장공비들이 숨어 있었어. 만약 그때 토벌 작전에 실패했다면, 전쟁도 하기 전에 한반도는 공산화됐을 거야.”

    이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경주 안강 지구에 투입됐다. 그가 받은 명령은 부산 점령을 노리는 인민군 12사단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남한을 공산화하려 했던 인민군과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해가 뜨자 미군 폭격기가 지원에 나섰다. 그는 폭격이 끝난 뒤에 인민군 시신이 적 진영에 널브러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은 북쪽으로 진격한다. 그가 있던 부대도 통일을 기대하며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대다수 북한 지역이 함락됐고, 미군과 국군은 장진호에 집결해 북한 임시수도인 강계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일이 잘 풀리면 크리스마스 전 장병 일부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고 워싱턴에 보고했을 정도로 다들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중국인민해방군 참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중공군들이 정말 많았어. 얼굴들을 보면 정말 나이가 어려 보였지. 중공군 참전으로 내가 어디서 싸우는지도 모르고 여러 차례 이동하면서 싸웠어.”

    백마고지 전투 승리 후 환호하는 국군 모습./경남신문DB/
    백마고지 전투 승리 후 환호하는 국군 모습./경남신문DB/
    6·25전쟁 당시 철원 백마고지에서 한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막았던 백마고지 전투 모습./경남신문DB/
    6·25전쟁 당시 철원 백마고지에서 한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막았던 백마고지 전투 모습./경남신문DB/

    주인 12번 바뀐 철원 백마고지 전투서
    어둠 속 총칼로 벌인 백병전 무섭고 두려워
    김화전투서 입은 총상 자국은 여전히 고통

    ◇12번 주인 바뀐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전투로 알려졌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이 발발하고 1년 뒤인 1951년 7월부터 휴전과 포로 교환 협상을 시작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이에 중공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에 나선다. 중부 전선에서는 고지 탈환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탈취해 철원평야를 제압하고, 중부 전선에 요충지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1952년 10월 6일 새벽 중공군 공격이 시작됐고, 열흘간 치열한 고지전이 전개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22만발의 포탄을 쏘았다. 중공군도 5만5000발의 포탄을 고지에 퍼부었다. 참혹했던 고지전과 수십만 발 포탄이 고지에 떨어지자 나무는 사라지고 민둥산만이 남았다. 이 전투로 국군 9사단 3500여명, 중공군 1만4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9사단 소속이었던 정창섭씨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고지를 찾기 위해 미군 폭격기가 먼저 공격했고, 그 뒤 국군이 돌격했다. 밤에는 미군 폭격이 없는 틈을 타 중공군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다.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밤에 중공군들이 올라오면 조명탄도 없으니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모르지. 말 그대로 참호에서 총칼로 백병전이 벌어지는 거야. 안 보이니 머리를 잡고 머리카락이 길면 공격했지. 당시 중공군은 머리카락이 길었고, 국군은 짧았거든. 인민군들이 쓰는 총을 ‘딱꽁총’이라고 불렀어. ‘딱’ 소리만 들으면 총 맞아 죽은 거고, ‘딱꽁’ 소리를 들으면 산 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중공군 애들이 중국말로 소리쳤던 게 지금도 생각하면 무섭고 두려워.”

    그는 백마고지 전투 때의 한 전우를 아직도 찾고 있다. 전투 당시 고지를 오르던 중 아끼던 부하 병사가 낙오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정창섭씨는 한밤중 그를 찾아 나섰고, 쓰러져 있는 전우를 발견했다. 전우는 상처를 입어 의식이 없었고, 다른 부대원들은 적에 발각될 수 있으니 철수하자고 재촉했다. 그냥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그는 후임을 업고 진지로 복귀한다. 다행히 후임은 살아 있었고, 의무대로 후송된다. “전쟁 때는 너무 많이 죽고 다치니 다 잊어 버렸는데 그 친구는 꼭 보고 싶네. 이름이 ‘최부갑’이었지. 살아있다면 꼭 만나 보고 싶어.”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이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70년이 넘은 전쟁의 기억= 그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에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는 휴전 직전 치러진 김화지구 전투에서 손에 총상을 입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총상 자국이 남아 있었고, 인터뷰 내내 손이 아렸는지 계속 주물렀다. 지금도 손이 아파 제대로 잠 못 드는 날이 많다고 한다.

    전쟁 내내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압록강까지 전진할 때도 제대로 보급이 안 돼 길에 쓰러질 지경까지 이르렀다. 간혹 미군 비행기가 보급품을 떨어뜨리고 가면 건빵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배고픔이 가져온 고통은 말할 수도 없지. 백마고지나 김화지구 전투에서는 보급대들이 참호에 식량을 가져다주려 할 때 적군이 저격했지. 공격을 피해서 참호 속으로 주먹밥을 던져서 전해줬어. 주먹밥의 흙을 털어내면서 먹었던 기억이 나네.”

    미래세대에 역사를 기억해 달라고 당부하는 정창섭씨.
    미래세대에 역사를 기억해 달라고 당부하는 정창섭씨.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에서 내걸린 참전영웅들중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김승권 기자/
    정창섭(93세) 6·25참전유공자가 창원시 의창구 도계동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에서 내걸린 참전영웅들중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김승권 기자/

    총칼 들고 나라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지탱
    커지는 한반도 안보 위협 강력 대응해야
    국가와 미래세대, 역사 지키고 기억해주길

    ◇북한 도발에 강력히 대응해야= 그는 휴전 소식을 들었을 때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났다기보다는 잠시 전투가 멈췄다고 생각했다. 곧 그는 제대해 정미소를 차려 자녀 5명을 키웠다. 큰아들은 ROTC를 지원해 소위로 임관해 군 생활을 했다. 그의 가정은 3대 병역 명문가이기도 하다.

    최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쟁 협박 발언과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 안보 위협이 커지고 있다. 참전영웅은 북한 도발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민군들은 정말 독해. 전쟁 때 포로가 된 인민군들에게 정보를 캐기 위해 취조해도 입도 뻥긋 안 했지. 말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몽둥이로 패도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쳤어. 북한은 정말 무서운 상대이니 쉽게 생각하면 안 돼. 전쟁으로 안 번지기 위해서도 도발에 강력히 대응해야 해.”

    그는 미래 세대들에게 전쟁을 기억하고,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또 참전용사가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니, 정부에서 빠르게 보훈 정책을 확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총과 칼을 들고 나라를 지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야. 그 자부심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어. 국가와 미래 세대들이 이 같은 역사를 지키고, 기억해 줬으면 하지. 그래도 나 죽으면 이런 이야기들이 다 사라지는데 신문에서 기록해 준다니 참 고맙네. 기분도 좋고.”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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