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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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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여기어때] 남해 ‘이순신 순국길’

‘충무공 넋’ 숨 쉬는 길, ‘호국의 혼’ 숨 쉰다
관음포~첨망대~이락사~충렬사
7.2㎞ 충무공 이순신 유해 운구길

  • 기사입력 : 2023-02-02 21: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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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1598년 11월 19일(음력). 겨울 해가 여명을 밝힐 때,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가 쏜 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총탄에 맞는 순간, 바닥에 쓰러진 공은 스스로 죽음을 직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7년 전쟁 동안 곁을 지켰던 군관 송희립이 다급하게 공을 선실로 옮기면서 총탄이 깊지 않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공은 그의 말이 위로로 끝날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들 회와 조카 완의 울음을 가까스로 막은 송희립이 공의 옷을 대신 입고 독전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관음포(觀音浦: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앞 민가 굴뚝에서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나는 것이 아득하게 눈에 들어왔다. 울음소리가 가늘게 이어지다 뚝 끊겼다.

    공의 나이 쉰넷이었다.

    관음포에서 이락사로 가는 길. 쭉쭉 뻗은 소나무가 열병하듯 서 있다. 단심을 상징하는 동백은 낮은 공간을 채우고 있다.
    관음포에서 이락사로 가는 길. 쭉쭉 뻗은 소나무가 열병하듯 서 있다. 단심을 상징하는 동백은 낮은 공간을 채우고 있다.

    #관음포는 충무공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을 따 이락포(李落浦), 이락파(李落波)로 불린다.

    충무공의 임종을 받아들이고, 유해를 처음 뭍에 안치한 땅이다.

    관음포(觀音浦)~첨망대(瞻望臺)~이락사(李落祠)~충렬사(忠烈祠)로 이어지는 일명 ‘이순신 순국길’은 7.2㎞에 이른다.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승리, 동북아 질서와 평화를 지킨 전쟁 영웅에 이름을 올린 동시에 전사함으로써, 유해가 운구된 길이다. 백성들의 울음과 무능한 조정에 대한 울분이 서린 땅이다.

    유해는 충렬사에서 임시 안치된 뒤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졌으며, 충남 아산 현충사에 묻혔다.

    이락사. 이 충무공의 순국 현장에 모신 사당. 이락은 이 충무공이 숨을 거둔 곳이라는 뜻이다.
    이락사. 이 충무공의 순국 현장에 모신 사당. 이락은 이 충무공이 숨을 거둔 곳이라는 뜻이다.

    #추위가 맹위를 떨친 1월 26일. ‘그날’의 아침만큼 바람이 차고 겨울이 깊은 이날, 충무공의 시신이 운구된 7.2㎞ 중 관음포~이락사 600여m를 걷는다.

    관음포 앞. 온통 바위뿐인 뭍에 발을 딛자 광양제철이 지척이다. 자연산 굴을 채취하는 동네 아낙 여럿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다. 바다 앞 뭍에서 첨망대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나무와 풀을 베 길은 냈지만 발을 딛기엔 만만찮다. 숨이 찬다. 다리도 풀린다. 조선을 걱정하던 충무공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무너져 들어간, 끝내 살아서는 오르지 못한 뭍의 그 길은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까. 그날, 배에서 충무공의 임종을 수습한 송희립의 마음은 어땠을까.

    바람이 드세다.

    그러나 공이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던 1598년 11월 18일 자정께 혼자 갑판 위에 올라가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맹세하던 그 차가움보다는 더 거세지도, 깊지도 않았다.

    관음포. 이 충무공 유해가 배에서 육지로 처음 도착한 곳으로 추정된다.
    관음포. 이 충무공 유해가 배에서 육지로 처음 도착한 곳으로 추정된다.

    걸음이 너무 쉽고 가벼워 부끄러웠다. 공의 생애보다 나이를 더 먹었지만 아직도 삶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자책에.

    조선의 땅과 백성을 유린한 왜적에 대해 같은 하늘을 이고 함께 살지 못할 대상, 즉 불구대천으로 삼았던 그의 기상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잡한 인식도.

    2m의 칼에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검명을 새긴 그의 마음을 생각하니 그저 먹먹하다. 칼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리고 깊게, 끝 모를 슬픔으로 울고 있다.

    검에 새긴 염(染)자의 늪과도 같은 깊이. 물 비늘이 일렁이면서 뱉어내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가여움, 삶의 가벼움. 피비린내가 바다를 적시고도 남을 만큼의 분노가 겨울 오후, 소나무 사이를 뚫고 내 가슴으로 깊고 세차게 파고들었다.

    첨망대를 지나자 평탄한 길이 나온다. 이락사까지 500m 길은 순하다.

    첨망대. 이곳 누각에선 관음포 앞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첨망대. 이곳 누각에선 관음포 앞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키가 큰 소나무가 열병하듯, 쭉쭉 뻗어 있다. 충무공의 웅혼한 기상을 빼닮은 듯했다.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한 그에게 보내는 작은 예의와 같았다.

    1열이 소나무의 도열이라면 2열은 동백이 차지했다. 단심이다.

    아직 피지 않았지만 봄이면 어느 지역보다 붉은 꽃으로 국가와 민족을 향한 충무공의 붉은 마음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어느새 이락사와 대성운해(大星隕海:큰 별이 떨어지다)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좌우에 큰 소나무들이 지키고 있다.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직접 써서 붙였다고 기록돼 있다. 공의 유언(전방급 신물언아사)은 호국공원에서 이락사로 가는 방향의 오른쪽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높이가 8m에 이른다. 1998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 추모식 전에 제막되었다. 남해군 설천면 출신 유삼남 전 해군참모총장의 휘호라고 적혀 있다.

    유언이 전하는 메시지, 높다른 자연석이 마치 공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다. 충무공의 그날 아침 꾸짖음과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유허비와 유언을 새긴 표지석.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유허비와 유언을 새긴 표지석.
    남해 충렬사. 이 충무공 유해가 임시 안치된 사당이다. 유해는 충렬사,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갔다.
    남해 충렬사. 이 충무공 유해가 임시 안치된 사당이다. 유해는 충렬사,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갔다.

    ◇생각해보기1

    남해군민에게 관음포는 호국성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라고 적고 있는 등 이 지명은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왜구를 무찌른 전승지뿐만 아니라 몽골을 물리친 대장경판 판각지이기도 한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고려 고종 23년(1236), 이곳에서 판각됐다. 지금도 호국공원 한쪽에 그 증거를 남겨두고 있다.

    ◇생각해보기2

    작가 김훈이 〈칼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은 나이는 54살. 이 충무공이 전사한 나이와 같다.

    김훈이 책 서문에서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서 이 우연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는 출간에 앞서 저술에 몰두하던 2000년 가을부터 2001년 이른 봄까지, 그 차가운 겨울을 충남 아산 현충사 근처에서 머물렀다. 마음이 더 깊게. 충무공의 검과 검명에 그는 주목했다. 검을 직접 보는 것처럼, 손이라도 베일 것 같은 느낌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의 글은 가볍게 살아온 사람에 대한 경고 같아서 관음포에서 이락사를 걷는 내내 걸음이 무거웠다.

    글·사진= 이병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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