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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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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멸 극복 프로젝트-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8) 하루도 놀 시간이 없다

파란만장한 93년 세월, 굴곡진 손에 고스란히

  • 기사입력 : 2022-09-04 20: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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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자부터(이제부터) 날로(나를) 보거들랑 형님이라 부르그레이, 알았제?”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취재팀 ‘마기꾼들(마을기록꾼들)’이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을 찾아 떡을 돌리며 ‘전입신고’를 한지도 어느덧 두 달이 됐는데요. 입사마을 주민분들 가운데 표종연(94) 어르신 다음으로 연세가 많으신 분은 바로 신판도(93) 어르신입니다. 마을 주민분들 심부름하며 마을을 오가던 중 만난 신판도 할아버지께 인사 드리고 처음 대화를 주고받던 지난달 초. 어르신은 제 손을 꼬옥 잡으시고선 대뜸 앞으로 형님으로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예? 형님이라고요?”

    이유는 이랬습니다. 입사마을은 황해도 평산군을 본관으로 하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의령 집성촌입니다. 제 고향은 밀양인데요.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께서도 평산 신씨이셨는데, 밀양에는 무안면 중산마을이 바로 할머니가 태어나신 평산 신씨의 집성촌이기도 합니다. 신판도 어르신께서도 밀양에 종친 집성촌이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셨는데, 1924년생이신 저희 할머니 성함을 들으시고선 곧바로 당신보다 2대 위라고 하시는 겁니다. 할머니와 저도 2대가 차이 나니 저와는 형제 항렬이고, 고로 이제는 ‘형님’이라 부르라는 기적의 논리(?)였습니다. 형님이라 진짜 불러야 하나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질 무렵, 할머니 성함에 쓰인 한자를 다시 보시고선 1대 위라고 다행히(?) 정정해주셨는데요, 이제부턴 ‘아재’라 부르라고 깔끔하게 교통정리도 해주셨습니다. 처음 본 낯선 청년도 “한 일가와 마찬가지”라며 살갑게 대해주시려는 어르신의 깊은 마음이 제게도 잘 전해졌습니다.

    신판도씨가 93년간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울퉁불퉁한 자신의 손을 보여주고 있다.
    신판도씨가 93년간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울퉁불퉁한 자신의 손을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사의 ‘산증인’= 조카가 된 이후로 여러 번 어르신을 뵙고 어르신의 삶도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1930년 입사마을에서 태어나신 신판도 어르신은 의령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45년 열다섯 살 나이에 북해도로 끌려갔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극에 달했을 당시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지면서 고등학생인 신판도 어르신도 어린 학도병으로 전선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당시 의령에선 각 면에 1명씩 총 12명이 함께 북해도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키 크제, 인물도 좋았제, 왜놈말(일본말)도 잘 하고 날래다보니 면에 1명씩 가는 거 내가 차출된 기라. 기가 맥히지(막히지). 1000명이 넘는 사람이 한 배 타고 며칠을 올라 안 갔나. 거가(거기가) 반튼은 일본놈 땅, 반튼은 양놈 땅이었는데 총이 귀해서 우리한테는 주지도 않고 칼 2자루만 딱 주는기라….”

    그해 북해도에서 광복을 맞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신판도 어르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도 최전선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22세의 나이로 11사단에 입대한 어르신은 당시 제주도에서 20일간 기초군사훈련만 받고 평안북도 청진까지 올라가야 했던 열악한 상황을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청진으로 올라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명령이 내려져 신 어르신이 속해 있던 중대는 다시 강원도로 내려왔는데요. 여기선 하루에도 수 차례 주인이 바뀌는 백마고지 전선에도 투입돼 고지전을 벌이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다고 합니다. 해질녘 붉은 핏물이 흘러가는 철원 계곡과 너른 들판을 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하셨다는데…. 청년이었던 신판도 어르신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전쟁이 끝나고 3년 뒤 제대한 어르신은 꿈에 그리던 궁류면 입사마을로 돌아오셨습니다. 이후 그해(1956년) 면의회 의원이 된 후 14년간 지방의회에 계시면서 지방자치의 막이 올랐던 그 시대의 중심에 있기도 했습니다. 어르신은 이후 평생 입사마을을 떠나지 않으며 땅을 일궈 정직하게 농사 짓고 살아오셨는데요, 부모와 조부모를 모시면서 슬하 5남2녀도 훌륭하게 키우셨고요. 이쯤되면 입사마을의 큰 어른이자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겠죠?

    신판도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신판도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93세 어르신의 일상 들여다보니=지난 1일 찾은 입사마을 입구에선 깡마른 체구, 굽은 허리의 신판도 어르신이 전동스쿠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계셨는데요, 바로 토종꿀벌을 키우기 위해 통나무로 된 벌통을 마을회관 옆 산 초입에 놓고 오시려는 거였습니다. 끈으로 통을 감아 허리춤에 묶은 뒤 산으로 올라가 바위 위에 통을 놓고 내려오시는 작업이었는데, 거동이 불편한 탓에 쉽지 않으시겠구나 싶어 제가 벌통을 두손으로 들고 어르신 뒤를 쫓아가기로 했습니다.

    신판도씨의 검정고무신.
    신판도씨의 검정고무신.
    신판도씨가 자신의 집마당에 있는 토종벌통을 도영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신판도씨가 자신의 집마당에 있는 토종벌통을 도영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도 기자가 토종벌통을 짊어지고 가려는 신판도씨를 만나 벌통을 들고 있다.
    도 기자가 토종벌통을 짊어지고 가려는 신판도씨를 만나 벌통을 들고 있다.

    그런데 웬 걸요. 어르신은 93세라는 연세가 좀처럼 믿기지 않을 속도로 맨발에 고무신을 신은 채 산을 훑듯이 누비고 다니셨습니다. 흡사 도인이 이런 모습일까 생각하며 따라가는데, 제 숨은 거칠어지고 가파른 경사지에선 중심을 잘 잡지 못해 다리가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바위 틈에 돌로 받치고 통을 내려놓은 뒤 숨을 고르는 새 순식간에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신 어르신을 따라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더군요.

    입사마을 야산에 설치한 신판도씨의 토종벌통.
    입사마을 야산에 설치한 신판도씨의 토종벌통.
    벌통 입구에 모여 있는 토종벌.
    벌통 입구에 모여 있는 토종벌.

    어르신이 고령에도 어떻게 이렇게 산을 잘 타시나 궁금했는데요. 군 제대 후 청·장년 시절 온 산을 누비고 다닌 ‘명포수’였다고 하시는군요. ‘의령 신포수’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그러나 어르신은 살아있는 짐승을 잡는 게 몹쓸 죄라 생각해 그만두고 그 시절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자식들에게도 ‘함부로 살생하지 마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시고요.

    “예전엔 날랬는데 이제 나이 묵으가 내가 하는 기 뭐 있노. 벌 키우고 소 믹이고(먹이고) 이기 내 직업이지.”

    엽사일을 그만둔 후로 어르신은 토종벌을 키워오셨는데요. 그 세월도 5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흔 둘이셨던 지난해에도 꿀을 무려 50통이나 따셨고, 전라도와 강원도까지 벌을 분양하실 정도입니다.

    신판도(93)씨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에서 마당에 있는 토종벌통 앞에 앉아 있다.
    신판도(93)씨가 의령군 궁류면 입사마을에서 마당에 있는 토종벌통 앞에 앉아 있다.

    올해 키우고 있는 벌통도 12통인데요, 어르신은 마기꾼들에게 직접 벌통을 구경시켜주셨습니다. 어르신은 이날 시시때때로 날아와 토종벌을 물어죽이는 엉덩이에 노란 띠를 두른 ‘대추벌(말벌)’ 잡기 삼매경이셨는데요. 하루에 20마리 이상을 잡는다며 직접 보여주시는군요. 참, 올해는 글쎄 “주소도 모르고 번지도 모를텐데 2통에서나 벌이 새로 날아왔다”며 “50년 벌을 먹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함박웃음을 보이십니다. 조카인 저 맛보여주는 김에 모두에게 꿀 맛을 한번 보여준다고 하셨는데요. 50년 경력 어르신의 꿀은 어떤 맛일까요?

    말해 뭐해요. 여태 먹어본 꿀 중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도 기자가 토종꿀을 뜨고 있다.
    도 기자가 토종꿀을 뜨고 있다.

    ◇“우리 막내이…”= “마이(많이) 떠났지, 3분의 1도 없다 이제.”

    입사마을은 물론 궁류면에서도 이제 최고참 어르신이신 신판도 할아버지는 불과 10여년 전보다도 더 썰렁해진 마을을 보며 적적함을 느끼시기도 합니다. 특히나 마을뿐만 아니라 면에서도 어르신과 동년배이신 남성 어르신은 서너명남짓뿐이라 더 쓸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카야, 나중에 어른 편찮아도 절대로 요양원에는 모시지 말그레이.”

    제게 이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자식들이 다 도회지로 떠나고 혼자 살다 하나둘 떠나간 동년배 어르신들 이야기였습니다. 자식들 손에 이끌려 요양시설로 가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등질 때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 모양입니다. 가족의 품에서 품위있게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지 못한 채 말이죠.

    어르신이 저희를 만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건 토종벌, 소, 전쟁, 동년배 어르신 이야기도 아닌 자식 이야기입니다. 부모 마음이란 이런 것이군요. 눈에는 혹이 생겨 수시로 눈물이 흐르고 온 관절이 성치 않으면서도 어르신은 오십이 훌쩍 넘은 막내 아들 걱정이 늘 앞서나 봅니다.

    “내가 막내이캉 같이 산다. 궁류면 청년회장도 했고, 우리 논하고 넘으(남의) 논까지 90마지기나 짓고 양파하고, 마늘도 하고, 조합일도 하고, 학교 위원장도 하고 가(그애)는 하루도 놀 시간이 없다. 우리 막내이 덜 고생해야 할 낀데….”

    글= 도영진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지역소멸극복 프로젝트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영상은 유튜브 경남신문 채널을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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