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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0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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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이어령 명예교수를 애도하며- 박창근(김해시 하천과장)

  • 기사입력 : 2022-03-21 2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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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년시절 나는 지금의 내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꿈 많은 문학소년이었다. 방과 후면 개울 언덕에 누워 시를 읽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한 시가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중략~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을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1958년 황동규 시인이 18세에 쓴 산문시다. 이 시가 미당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돼 황동규는 시인으로 등단한다. 미당은 심사평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지성을 만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기 23세의 나이로 문학예술에 ‘현대시의 환위와 한계’로 등단한 신인 이어령이 ‘우상의 파괴’란 비평으로 당시 문단의 거목이던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해 단숨에 문단의 총아가 된다. 이 사건은 내가 이어령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의구심에 문학비평에 무지한이 그의 저서를 읽어 나갔다. 이어령에게 기성문단은 어려운 시대를 외면하는 한가한 문사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967년 분지필화사건에 작가 남정현의 법정 증인으로, 1968년 불온시 논쟁으로 시인 김수영과 문학의 현실참여를 주도하며 암울했던 군부독재시대 대표적 논객으로 활동했다. 그는 문학평론가, 소설가, 논설위원, 교수, 88올림픽 굴렁쇠 굴리는 소년을 만든 문화기획자, 문화부장관 등 실로 다양한 직함을 가진 다재다능한 신분으로 살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의 입으로 자신을 “나는 대학교수도 아니고 장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일개 이야기꾼이다” 했으니 그를, 삶을 사랑한 우리시대 마지막 논객이라 불러주면 어떨까?

    그는 지난 2월 26일 편안히 운명했다. 89년의 삶은 치열했고 늘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을 기억하는 순간 삶이 농밀해진다고 죽음 직전에도 메멘토 모리를 외쳤다. 삶과 죽음은 손등과 손바닥같이 늘 함께 존재해서 떼어낼 수 없다고. 10년 전 내 나이 46세에 신장암 수술을 하고 내려오는 차안에서 비로소 느낀 감정을 유년의 이어령이 외쳤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자.

    박창근(김해시 하천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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