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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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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889) 아경아사(我敬我師)

- 나는 나의 스승을 존경한다오.

  • 기사입력 : 2021-07-20 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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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고려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해당되는 북송(北宋 : 960-1127)은 중국 역사상 학술과 문화가 가장 발달하였다. 학자 문인 예술가가 가장 많이 나왔던 나라다.

    북송의 대표적인 인물로 소식(蘇軾)이 있다. 호가 동파(東坡)이기 때문에 보통 소동파(蘇東坡)라고 한다. 학자, 문인, 시인, 서예가, 화가, 의사, 요리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 그가 지은 문장이 4400여 편인데, 중국 역사상 제일 많다. 시는 2800여 편이다. 학문적으로는 유교 불교 도교에 다 통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송나라 제일의 문장가, 송나라 4대 시인, 4대 서예가로 추앙받는다. 동시대에 그보다 9살 적은 황정견(黃庭堅)이 있었다. 호가 산곡(山谷)이라 보통 황산곡(黃山谷)이라고 부른다. 역시 송나라 4대 시인이고, 4대 서예가에 든다.

    두 사람의 기질이나 취향은 서로 다르면서도 평생 뜻이 통했다. 소동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시를 지었다. 반면에 황산곡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지었다. 서예의 격조도 완전히 달랐다. 소동파는 황산곡을 만나기 전에 그 시를 보고서 “지금 세상에서 이런 시를 지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극찬하였다. 10년 동안 시를 주고받다가 만났다.

    소동파가 임금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사형을 당할 뻔했을 때, 만나 본 적이 없는 황산곡이 황제에게 “그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다가 벌금형을 당했다.

    황산곡은 소동파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평생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 했고, 귀양도 몇 번 갔다. 그러나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소동파의 시는 따라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황산곡은 규율을 엄하게 지키기 때문에 따라짓기가 쉬워 그의 시를 따라 짓는 시파(詩派)가 생길 정도였다. 세상에서 소황(蘇黃)이라고 늘 함께 일컬었다. 1101년 소동파가 세상을 떠나자, 황산곡은 자기 집에 빈소를 차리고, 초상화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술잔을 올리며 추모하였다. 그 광경을 본 아는 사람들이, “뭐 그럴 것 있소? 당신이 소선생보다 더 나은데?”, “겨우 9살 차인데 무슨 스승이요? 그냥 친구지”라고 비웃었다. 황산곡은 흠칫하며 나무랐다. “소선생은 나의 큰 스승으로 내가 평생 존경하는 분이요. 소선생의 학문이나 덕행을 더 배우지 못 한 것이 큰 한이요”라고 하며, 평생을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필자 연배의 사람들은 여건이 좋은 시대에 연구했지만, 지금부터 50년, 30년 전의 선배 교수들은 정말 난리 통에 책이 없는 악조건 속에서 공부를 하였다. 유학도 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름대로 대부분 열심히 연구하였다.

    오늘날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스승격인 선배학자들을 무시하여 “학문이 별 것 아니다”, “학계에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등등의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이 개척자적인 기초를 닦았기 때문에 후속세대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분들의 좋은 점을 선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 我 : 나 아. * 敬 : 공경할 경.

    * 我 : 나 아. * 師 : 스승 사.

    동방한학연구소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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