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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수학(數)으로 나는(飛) 문(門)-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21-07-08 2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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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시골을 지나다가 예쁜 초등학교를 만났다. 알록달록한 건물 외벽과 일자형의 건물 구조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초등학교와 비슷했지만 담장과 교문이 독특했다. 담장은 흙돌담이었고 교문은 사대부집처럼 솟을대문이었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교문에 가로로 걸린 편액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數飛門”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수학(數)으로 나는(飛) 문(門)’. 아닌 게 아니라 ‘전직 수학 교사’인 내게는 저 뜻이 ‘수학실력이 날고 기는 (혹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만 드나드는 문’으로 읽혔다. 아니 초등학교 교문에다 대놓고 저렇게 ‘수학’만 옹호하며 교육과정의 파행을 조장하다니. 그럼 국어를 편애하는 국비문(國飛門)이나 영어를 독려하는 영비문(英飛門)도 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나의 얕은 한문학적 소양이 못 미더워서 ‘수비문’을 검색했더니, “한국 축구 수비가 문제다” “토트넘의 수비는 자동문” 등이 뜰 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한자로 ‘數飛門’을 검색했더니 곧바로 이 학교의 교문 사진부터 뜬다. 그런데 한자의 음이 ‘수비문’이 아니라 ‘삭비문’이었다. ‘數’자의 뜻과 소리가 ‘셀 수’뿐만 아니라 ‘자주 삭’ ‘촘촘할 촉’ ‘빠를 속’ 등 네 가지나 됐다. 이 경우에는 ‘수비’가 아니라 ‘삭비’로 읽어야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삭비’를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명수배 내린 듯이 ‘삭비’와 연루된 것들은 줄줄이 달려 나온다.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고 정리한 요지는 이렇다. ‘삭비(數飛)’란 ‘어린 새의 날갯짓’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주희(朱熹)가 ‘논어’를 주석한 ‘논어집주(論語集註)’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시다시피 ‘논어’의 학이편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과 그 중요함을 역설한 대목이다. 그리고 주희는 ‘논어’의 이 구절에다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습, 조삭비야. 학지불이 여조삭비야.(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풀어 옮기자면 이렇다. “습(習)이란 글자는 새가 날갯짓하는 모양에서 온 것으로, 배움에 멈춤이 없는 것은 마치 새가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학습의 반복성을 두고 한 말이다. 특히 초등교육의 요체는 강요된 창의보다는 반복과 그것을 통한 체득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의 교문이 ‘삭비문’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니, 세상의 모든 초등학교 교문은 마땅히 ‘삭비문’이어야 할 것이다.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지만 의미와 기원을 어렴풋이 알고 다시 바라본 교문의 편액은 아름답고, 심오하고, 품격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문득 오래된 논쟁이 생각났다. 다름 아닌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기초 한자를 병기하고,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치자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이었다. 한자는 “특권층의 반민주적 문자”(한글학회)라고 배격하며, 한자 교육이 학생들의 학습량만 늘리고, 사교육만 부추길 것이라는 반대쪽 교사들의 우려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언어의 풍부한 쓰임을 위해서, 우리 전통문화의 이해와 계승을 위해서 어릴 때부터 한자 공부는 필요하다고 본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기까지 같이 버린 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아무튼 ‘한자 조기교육론’과는 별개로 이렇게 아름다운 교문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시거든 검색해 보시라. 그리고 시간이 나시거든 꼭 한번 찾아가 보시라. 그 교문 앞의 아름다운 정자와 학교를 끼고 도는 돌담길의 운치, 학교 주변 고택들이 풍기는 여유와 멋은 덤으로 드리겠다.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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