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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9월 2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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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집으로의 여행- 손음(시인)

  • 기사입력 : 2021-06-17 20: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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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평이라도 좋으니 내 소유의 땅이 있었으면 싶었다. 내 땅은 어디에 있나 상추도 백합도 장미도 심어야 하는데…. 살면서 몇 번이나 이사를 했을까. 그때마다 고민 없이 선택한 주거의 형태는 아파트였다. 학군이 어쩌고 상권이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허공에 뿌리를 박은 아파트는 어쩐지 ‘셀프감옥’에 갇혀 사는 것 같았다. 베란다 화분 정도로는 채워지지 않는 정서를 어쩌나 싶었다. 가끔 마당이 있는 본가의 옛집을 그리워했지만 그 먼 곳의 깊이는 애틋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세월은 성실한 걸음으로 어딘가로 돌아나가고 인생의 꿈은 금방 체념으로 뒤섞여버리고 만다.

    시간은 흘러 추억의 상징물인 집을 들고 자주 내 곁에 출몰했다. 아이들도 어느덧 성장하여 제 앞가림을 하겠다며 부모 곁을 떠났다. 이때다 싶었는지 숨겨둔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주택에 대한 그리움과 용기가 다시 생겨났다. 주변의 지인들은 재산 가치로서의 주택을 염려하며 나의 비합리적 ‘주택행’을 걱정했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나는 나를 이겨 먹었다.

    지금 원고를 쓰는 곳은 내 집 ‘주택’이다. 나는 드디어 ‘주택인’이 되었다. 집은 각설탕처럼 희고 예뻤다. 집의 위치가 도심의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하여 비교적 ‘문화 소외’가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좁으나마 마당도 만들고 텃밭과 수돗가를 만들어 주택의 구색을 갖추었다.

    담장에는 빨랫줄을 걸어 이불과 옷가지들을 볕 좋은 햇살에 말리며 이웃이 만들어 주는 ‘찌짐이’를 넙죽넙죽 받아먹어도 미안하지 않았다. 사람의 인정이란 것이 채소처럼 싱싱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물론 그동안 서로가 알게 모르게 들인 노력과 정성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원래가 선량한 인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택의 시간은 꽃이 피는 감각으로 흘러간다. 이제 주택 살이도 어느덧 5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친근해진 이웃들은 오며 가며 서툰 우리집 농사에 농을 걸며 잔소리를 곁들여 씨앗이며 모종을 교환하기도 한다. 평화는 이렇게 평범한 이름들이 만드는 것이리라.

    곧, 여름의 정점이 올 것이다. 태생이 낡고 빈티지한 것을 좋아하다 보니 복작복작한 골목의 주택가에 쪼그려 앉은 화분에 자주 마음을 빼앗긴다. 꽃이 제공하는 심심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돌아오는 계절마다 가드너가 되어 꽃을 심고 나비를 기다린다. 수국, 제라늄, 마거릿, 꽃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마다 한 계절이 지나간다. 황인찬은 시 ‘피카레스크’에서 화단에 가득 피어난 꽃들이 다 죽은 것을 보며 여름 내내 울었다고 했다. 꽃은 이렇듯 우리에게 슬픔을 꽉 껴안아 주는 힘이 있다. 땅이 주는 힘과 주택이라는 개방된 공간이 주는 에너지가 이렇게 기쁨의 모양을 만든다.

    코로나 시대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장기화하면서 집의 가능성과 가치는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집의 기원은 은신처의 기능에서 시작되었지만, 현대로 오면서 휴식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제 인간의 집은 일과, 꿈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의 기능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주택인’으로서 살아가는 생활의 면면을 주로 얘기하였지만 아파트든 주택이든 주거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집과 가족에게 바치는 진정성과 가치의 문제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마음의 배낭을 메고 함께 ‘집 여행을 떠나자.’

    손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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