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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2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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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2만9603명 희생 기억하는 세상 됐으면…”

[기획] 경남지역 6·25 참전유공자 (하) 펜 놓고 전선 뛰어든 소년병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

  • 기사입력 : 2021-06-13 21: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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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동강까지 밀린 10만여명 국군장병들에게 3만여 소년병들의 참전은 큰 힘이 됐어. 소년소녀병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나라는 없었을지도 몰라.”

    소년소녀병은 6·25전쟁 당시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고 입대한 만 13~17세(1933년~1937년생)의 소년·소녀를 말하며 전국적으로 2만9603명 모집됐다. 군번과 계급이 없고 해산일이 정해져 있는 학도병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1950년 8월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펜을 잡았던 15세 진해 소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소년병을 자처했다. 소년은 군번줄을 목에 걸고 계급장을 가슴팍에 붙인 채 5년간 전장을 누볐다. 이제는 86세 노인이 된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풀어 놓았다.

    15세 나이 속여 입대해 통신병 배치
    포항 전투·철의 삼각지 전투 등 투입

    도내 생존자 9명… 그들이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예우 받는 좋은 소식 기대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6·25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6·25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나이 속여 입대… 통신병 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진해읍사무소 앞에는 하루하루 전쟁 현황이 나붙었다. 함안·마산까지 인민군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 손씨가 다니던 진해공립중학교에 군인들이 찾아와 18세 이상 학생들에게 입대를 요청했다.

    이에 5~6학년 중학생(만 18~19세)들이 자진해 지원서 작성에 나섰다. 당시 2학년(만 15세)이던 손씨와 동기들도 나이를 18세로 속여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입대한 학생이 진해공립중학교에만 207명. 이들은 1950년 8월 31일 부산역행 열차에 올랐다. 결의에 찬 소년들이 탄 열차 안에는 ‘용진가’가 울려 퍼졌다. 손씨는 부산 영도에서 2주간 무전기 사용 등 기초 훈련을 받고 학교 동기 곽종결·김원태 소년병과 함께 수도사단 제26연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

    “당시에는 군인이 되면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했어. 조건도 안 되는데 입대를 자처한 우리들을 요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일제 식민 통치를 당했는데, 또다시 나라를 뺏길 위기에 놓였잖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 내 모든 것을 내놓더라도.”

    ◇수많은 전투 속에 사라져간 소년병들= 손씨는 26연대 3대대 본부중대에 배치되자마자 포항 전투에 참전했다. 실무교육은 단 2일. 하늘에는 F-80 전투기가 적진을 공습하고, 30㎏ 무전기를 멘 손씨는 형산강을 건너며 적과 맞서 싸웠다.

    “첫 전투 당시에는 총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지. 전투를 마치니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이후에는 견적필살(적을 보면 반드시 죽인다)의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지.”

    이후 수도사단은 하루 24㎞씩 북진하며 인민군을 밀어붙였다. 전투 과정에서 죽음과 마주친 적도 있다. 1950년 10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에 진지를 구축했을 때, 중공군이 일제히 진지 쪽으로 기습 포격을 가했다. 간신히 포탄을 피한 그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진지 무전기를 파괴하고 10여시간 달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철의 삼각지라 불리는 금화지구 수도고지 전투. 1952년 7월부터 10월까지 99일간 전투로 수도사단에서 발생한 전사·부상자만 4200여명에 달했다. 이 중에는 손씨의 친구 권영우 소년병도 있었다.

    “소년병 2573명이 전쟁 중 전사했어. 이 외에도 부상자들을 직접 이송했는데 모습들이 너무 처참해 생지옥이 따로 없었어. 금화지구 전투는 수도고지 사수라는 목표 하나로 남북간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지. 누구 때문에 한민족이 전쟁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더라고. 지금도 분노가 느껴져.”

    손씨는 휴전 이후에도 1년 6개월 복무기간이 연장돼 제2예방의무 중대에서 위생 병과로 복무하다 1955년 1월 20일 20살의 나이로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등을 받고 전역했다.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6·25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장이 소년병으로 참전한 6·25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복학 거부당하고 다시 군으로= 손씨의 꿈은 ‘서울권 대학 입학’. 손씨는 꿈을 위해 진해공립중학교를 방문해 복학 신청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문교부 지시가 없어 안 된다’였다. 편입시험이라도 치게 해달라는 부탁에도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꿈을 포기할 수 없던 그는 강습소에 다니며 4년간 독학했지만 참혹한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지금도 학력은 나의 아킬레스건이야. 만약 군대를 안 갔더라면 20살 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7남매 중 장남인데 동생들이 점점 커가니 부모님을 도와줘야만 했어. 4년간 잡은 펜을 또다시 놓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 다행히 해군군수사령부 군부대에 채용됐어. 나를 불러주는 곳이 군대밖에 없었던 거야.” 그는 군무원으로 38년간 근무한 뒤 1996년 6월 군무 부이사관으로 퇴직했다.

    ◇소년병, 잊히지 않길 바란다= “시간이 많이 흘러 생존자 자체가 많이 없어. 고생하신 분들은 일찍이 작고하셨지….” 손씨는 자신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전역 이후 교육·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던 다른 소년병들보다는 상황이 나았기 때문이다.

    손씨는 수십년간 희생된 소년병 전우들을 생각하며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입대한 소년병은 전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휴전 이후에도 복무를 연장하면서 불안정한 국군 전력에 큰 보탬이 됐다”면서 “전역 후에는 교육 공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에 특수성이 있다고 본다”고 당위성을 설명했다.

    현재 손씨가 확인한 경남의 소년병 출신 생존자는 진해 박차생(33년생)·설항수(34년생), 사천 임승규(35년생) 외 7명 등 총 9명 남짓. 이들 중 절반은 몸이 편찮아 정상적인 활동조차 힘든 상황이다.

    그는 “연락이 어느 순간 안 되면 작고했다고 생각해. 우린 그렇게 잊히는 나이인 거야. 소년병 2만9603명은 죽어 별이 되었겠지. 밤하늘 별들은 별자리로 기억하잖아. 소년병을 기억하는 별자리는 아직 이 나라에는 없어. 소년병을 기리는 기념비, 위령탑은 물론이고 ‘명예 회복을 위한 법안’도 두 차례 무산됐어. 사천 임씨가 몸이 편찮아. 틈틈이 전화 와서 (소년병 관련) 좋은 일 없냐고 물어. 생전에 소년병이 제대로 평가받아 알맞은 예우를 받았으면 해”라고 마지막 바람을 전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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