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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8월 13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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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봄날의 위로- 이진숙(소설가)

  • 기사입력 : 2020-04-09 20: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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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하지만 강한, 미지의 스텔스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무차별 공격했다.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자가 1만 명을 넘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다시금 연장되었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개학을 연기하고 공연과 집회 같은 단체 활동도 전면 금지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스러운 나날을 보내느라 서서히 지쳐가는 중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봄꽃은 연해 팡팡 터지고 개나리 진달래가 고운 색으로 산자락을 물들였다. 지난 휴일엔 만개한 봄을 마냥 보내기 아쉬워서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산청 원지는 양천강줄기와 경호강이 만나 진주 남강으로 흘러가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강 건너편에 나지막한 엄혜산(234m)이 있다. 원지둔치에서 엄혜산 쪽으로 놓인 잠길다리를 건너 시푸른 대숲길을 조금만 걸어가면 등산로가 보인다. 등산로 초입부터 연분홍빛이 하롱하롱 감겨들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려니 숨이 차오르고 등줄기에 땀이 뱄다. 잠시 쉬어갈 겸 주위를 둘러보는데 나무벤치가 보였다. 벤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내려다봤다. 경호강과 양천강이 굽이져 흐르다 합쳐지고, 멀리 지리산 봉우리가 겹겹이 포개져서 마을을 포근히 감쌌다. 강가에 선 키 큰 나무마다 초록물이 번지고 백로와 오리떼가 물속을 자맥질했다. 다시 산길을 걸었다. 등산로 양 옆으로 쭉쭉 벋은 소나무가 빽빽이 우거졌고 솔잎 깔린 흙길은 푹신하니 걷기에 편안했다.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분홍빛 꽃물결을 만들었다.

    아쉽게도 산행은 금방 끝났다. 반대편 등산로를 타고 내려오니 양천강변으로 난 조붓한 산책길이 나왔다. 벚나무 아래를 몇몇이 걷고 있었다. 나처럼 지는 봄이 아쉬워 산책 나온 듯 보였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스치면서 강변을 걸었다. 강가에 낚시꾼이 보였다. 낚싯대를 던져놓고 그늘막 아래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강물 위로 가끔씩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강가에 선 버드나무가 긴 가지를 늘어뜨려 목을 축였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나도 들어있다는 게 문득 행복했다.

    매화꽃은 광양과 섬진강이, 벚꽃은 진해군항제가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꽃 축제장에 밀려드는 차와 인파에 치여 파김치가 되면서도 해마다 꽃이 피면 다시 또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올봄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발이 묶이면서 내가 사는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봄마다 원지강변에 벚꽃이 터지고 엄혜산에는 진달래와 생강나무가 흐드러졌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나쳤다. 해질녘 강변에서 보는 주홍빛 노을과 그 속을 떼 지어 나는 철새와 둔치에서 공을 차거나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제야 귀에 들려온다.

    행복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진정한 행복이 바로 내 가까이에 있었다는 동화가 떠오른다.

    밤이면 강변을 걸으며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과 전화로 안부를 묻고, 바람에 꽃잎이 지는 것을 함께 아쉬워한다. 도란도란 산책을 나온 노부부와 아이의 자전거를 미는 젊은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미지의 스텔스 바이러스 ‘코로나19’로 인해 오래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을 되찾은 듯 한편으로는 위안이 된다. 내년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진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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