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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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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견위수명(見危授命)-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 기사입력 : 2013-12-3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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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학(儒學)의 기본 취지는 자신을 수양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역대로 많은 왕조에서 유학은 정치체제와 교육의 기본 바탕이 됐다.

    한(漢)나라 이후로 유학이 제왕에게 붙여 통치자를 변명하는 어용학문처럼 됐지만, 유학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선비는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항상 바른 길을 지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 세상을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했다. 그래서 선비가 사는 인근에서 살인사건이나 패륜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다른 선비들이 그 선비를 성토했다. 평소에 교화(敎化)를 펼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두 가지 큰 이유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해전의 승리와 경상도 일원의 의병활동이었다.

    의병은 누가 일으켰는가? 거의 대부분이 선비들이 일으켰다.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 가운데 벼슬 한 번 하지 않고 국가의 어떤 혜택도 받지 않은 포의(布衣)의 선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선비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국가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개인 재산을 다 넣어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했던 것이다. 그 이후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각지의 선비들이 의병을 이끌고 임금이 포위돼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려갔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1919년 3·1독립선언서에는 몇 가지 이유로 선비들이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한 달 뒤 유림대표 면우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義)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상과 우리의 독립의 염원을 하소연하였다. 이 글이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다. 그해 상해(上海)에서 결성된 한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인사들도 대부분 선비들이다.

    잘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교나 선비 이야기만 나오면, 욕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자들 가운데서 조선시대 선비만한 인격이나 처신을 갖춘 사람이 있는가?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있지만, 선비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너무 미미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한 선비들의 후손들의 불만이 컸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선비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이 없다.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3년 10월 8일 산청군(山淸郡) 남사(南沙)마을에 유림독립기념관(儒林獨立紀念館)이 준공됐다. 여기에는 경남도청, 산청군의 지원이 컸지만, 면우 선생 증손 곽덕경(郭德慶)의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한국유림대표 곽종석 선생을 비롯해 파리장서에 서명한 선비 137명의 공적과 유물 등이 전시돼 있고, 영상자료도 갖춰져 있다. 파리장서를 중심으로 한 유림독립운동의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갖춰져 있다. 선비들의 숭고한 정신이 유립독립기념관에 깃들어 있다.

    * 見 : 볼 견. * 危 : 위험할 위.

    * 授 : 줄 수. * 命 : 목숨 명.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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