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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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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묏자리’는 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

  • 기사입력 : 2020-04-10 08: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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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엔 아직도 셀 수없이 많은 풍수지사(지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중엔 이치를 깨닫고 의뢰인을 위해 깨친 지식으로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는 자가 있는가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는 것을 필자도 경험했다. 전자는 지식과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적선(積善)을 베풀지만, 후자는 얕은 지식과 짧은 경험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을 속인다.

    얼마 전 조부 묘를 이장한 이가 평소 알고 지내던 지관이 파묘(破墓·무덤을 파냄)한 조부의 자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다시 쓰기 위해 가묘(假墓·시신을 묻기 전에 임시로 봉분만 조성한 묘)를 해 둔 곳의 감정 의뢰를 한 적이 있다. 정말 자리가 좋은 곳, 소위 명당이 확실하다면 파묘한 곳을 다시 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반드시 팠던 광중(壙中·무덤구덩이)의 깊이보다 30cm 이상 더 파고 나서 안치해야 한다. 원래 깊이보다 적게 파게 되면 시신 아래쪽의 땅심이 약해 물(빗물 등)이나 나무뿌리 등의 침범으로 시신이 훼손될 수 있다. 의뢰인은 지관이 가묘를 한 곳의 묘미(墓尾·묘의 꼬리 부분)에서 불과 50cm 떨어진 곳에 있는 돌이 길석(吉石)이어서 대단히 좋은 자리라며 다시 쓰기를 권했다고 하며, 돌의 길흉 여부에 대해 물었다. 결론은적으로 시신에 해를 끼치는 돌이었다.

    터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하면 첫째, 주산(뒷산)의 산줄기(용맥)가 돌이 많고 지저분하며 경사도가 심해 시신이 편히 안식을 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신을 안치하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었다. 산이 근본이 없으면 악함이 온다고 했다. 둘째, 돌이 많다는 것은 고운 흙이 없다는 뜻과 같으며 광중에도 돌이 많음을 암시한다. ‘성필이박환위귀(星必以剝換爲貴·산은 반드시 박환이 되어야 귀하게 된다)’라고 했다. 셋째, 주변의 청룡(좌측 산)과 백호(우측 산), 안산(앞산)은 양호한 편이지만 주산이 험산이어서 의미가 없다.

    이를 ‘용혈위주, 사수차지(龍穴爲主, 砂水次之·산을 관찰할 때, 용과 혈을 우선으로 봐야하며 주변 산과 물은 다음이다)’라 한다. 넷째, 돌은 뜬 돌과 박힌 돌로 나뉘는데, 뜬 돌은 흉한 돌이며 박힌 돌은 길한 돌로서 묘미 위의 돌은 뜬 돌이라 흉한 돌로 시신이 편히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사항들을 근거로 가묘로 하기에 부적합한 곳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돌이 많아도 형상이 날카롭지 않고 박힌 돌이라면 진행하는 산줄기의 경사도를 점점 줄이면서 최종 점혈(占穴·묏자리를 잡음)할 자리를 만드는 곳도 있다.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운곡 원천석 묘가 그런 곳이다. 선생은 일찍이 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었는데, 이방원이 조선왕조 3대 왕으로 즉위해 수차 출사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치악산에 들어가 30여 년 동안 절의를 지키며 초근목피로 생활했다.

    그의 묘는 무학대사가 잡은 것으로 일명 ‘봉요혈(蜂腰穴·벌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혈)’로 알려져 있다. 산줄기는 곳곳에 박힌 돌이 있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마치 용이 좌우로 틀면서 서서히 내려 오는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비록 돌이 많긴 하지만 단단하고 고운 흙이 잘 덮고 있어 용세가 차분하면서도 귀품이 있으며 묘미와 묘의 좌우측에는 박힌 돌이 있어 정기가 모여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북서향이지만 제법 안온한 곳이다. 운곡의 묘는 교과서적인 명당은 아니지만 박힌 돌과 뜬 돌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곳이며, 박힌 돌로 인해 자리로 쓴 대표적인 곳이다.

    경기도 성남시에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둔촌 이집의 묘가 있다.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부인 영주황씨와의 합장묘이다. 산줄기부터 묏자리까지 비석비토(非石非土·돌과 같이 단단한 흙)로 이루어졌고, 좌청룡과 우백호를 갖추었으며 좌청룡이 곧 안산도 된다. 안산 뒤의 조산은 위엄과 기품이 있다.

    산줄기는 단단한 흙으로 좌우요동과 상하기복을 하며 내려와 묘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내뿜었다. 주산과 용맥, 좌청룡, 우백호, 안산과 조산 어느 것 하나 험 잡을 데가 없는 곳으로 생기가 가장 응집된 곳에 자리를 썼다. 돌과 같이 단단한 흙은 시신을 잘 보존해 자손에게 큰 복을 안겨다 준다. 둔촌의 묘가 그런 곳이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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