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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오케하자마 전투- 박민원(경남창원스마트산단 사업단장)

  • 기사입력 : 2020-03-31 20: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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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오다 노부나가(1534년 6월23일 ~ 1582년 6월 21일)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일본 통일을 이끈 사람이며, 기득권을 부정하고, 출신과 성분에 전혀 관계없는 인재의 등용, 서양문물에 대한 과감한 개방, 전쟁의 신 등 다양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여러 이야기 중 오케하자마(지금의 아이치현 나고야시와 도요아케시의 경계) 전투가 가장 다이나믹하기도 하면서 오다 노부나가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노부나가가 오와리국의 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아버지 이야기 등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 기회에 또 다루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가자. 1560년 6월 오다가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2만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을 침공하게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지명을 잠시 빌리도록 하자. 다시 말해, 일본 전국시대에는 모든 지역의 왕이 따로 따로 존재하였고, 전국(全國)이 전국(戰國)상황이었다. 다시 돌아와, 하동군의 왕에게 진주시, 함안군, 의령군을 점령하고 있는 왕이 침공한 것과 비슷한 형상이라고 보면 된다.(내용과 지명은 전혀 관련이 없음)

    그 당시 군사 2만5000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이며, 노부나가의 오와리국은 3000명정도의 군사밖에 없었다. 성안에 갇힌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이 계속 물어 보았다. “어떻게 할 계획인가?, 계획이 있습니까?” 노부나가는 그때 나이 26세였다. 가신들은 대부분 아버지 시대의 가신들이었고, 전투의 전략을 깊이 논의할 만큼의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여기서, 일단,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나가서 싸울 것인가?, 성안에서 싸울 것인가? 3000 군사로 나가서 싸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결정이고, 그렇다고 성안에서 싸운다 하여도 승리의 가능성도 낮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백성들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노부나가는 전령들에게 명령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있는 곳을 빨리 찾아라.” 노부나가의 땅이었기에 지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2만5000명의 요시모토 군대는 승리를 미리 자신하고 노략질과 전리품 수거에 군기는 분산되어 있었다.

    어차피 무게중심이 기운 전투라면 급소를 쳐야한다. 급소는 바로 적장 이마가와 요시모토 였을 것이다. 1000명 군사를 성안에 남기고 노부나가는 2000명의 군사를 직접 이끌고 요시모토가 있는 본진을 향해 곧장 달렸다. 때마침 6월 장마철이라 억수같이 비가 내렸고 적군도 설마 노부나가의 군대라고 의심하지 못하는 적군이 다수였다고 한다. 방심하며 식사(술자리였는지, 식사자리였는지)를 즐기는 요시모토에게 노부나가의 본진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때는 이미 늦었다. 사기는 오히려 노부나가 쪽이 높았고, 요시모토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노부나가가 2000명의 병력으로 2만5000명의 대군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1546년에 벌어진 가와고에성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와 더불어 ‘일본 3대 기습’으로 불린다. 노부나가는 이 전투로 당대 최고의 지명도를 가지게 되고 향후, 천하통일 목전까지 가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 전투는 때론 나에게도 큰 교훈과 가르침을 주곤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승부, 핑계 찾지 말고 이길 방법을 찾는 마음.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의 역사적 첫 데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민원(경남창원스마트산단 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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