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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의 길] (1776) 제25화 부흥시대 86

“먼 곳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자”

  • 기사입력 : 2020-02-21 08: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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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영은 부산에서 꽤 늦은 시간에 충주를 향해 출발했다.

    가을이라 해가 짧았다. 두 대의 승용차에 박불출과 이재영이 나누어 타고 동양은행 직원과 기생들도 한 명씩 탔다. 이재영은 계월과 나란히 뒷자리에 탔다.

    이재영은 부산을 떠나기 전에 요정으로 전화를 걸어 영주에게 충주와 이천을 다녀오겠다고 연락했다. 이철규에게도 전화를 걸어 충주로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이재영은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또 겨울이 오겠구나.’

    이재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한국의 경제가 요동을 칠 것이 분명했다. 화폐개혁이 이루어지니 현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박불출이 공장을 헐값으로 사라고 제안할 때 받아들여야 한다.

    전쟁은 어떤 사람에게는 몰락의 길을 가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재영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산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좋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길을 닦아 신작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대부분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군인트럭의 이동 때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리고는 했다. 군이나 면을 지날 때마다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검문을 했다. 그러나 박불출과 이재영은 특별통행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검문하지는 않았다.

    차가 울퉁불퉁 들어가고 튀어나온 길을 달리자 진동이 심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계월이 이재영의 팔을 잡았다.

    “계월아, 힘드냐?”

    이재영은 계월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아니요. 차가 너무 흔들려요.”

    “멀미 나?”

    “네. 조금….”

    “먼 곳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자.”

    “네.”

    멀미 때문인지 피로했는지 계월이 눈을 스르르 감고 이재영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아이고 계월이가 머리 올려주는 서방님 품속이라 편한 모양이네.”

    조수석에 탄 추향이 뒤를 돌아보고 웃었다. 기생은 박불출이 탄 차에도 둘이 타고 있었다. 계월이 무슨 생각으로 그의 품속에 쓰러져 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재영은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서 자도록 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논에서 벼를 베고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밀양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웠다.

    “회장님, 운전기사가 밤길은 위험하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통행도 잘 안 시키고 공비도 출몰한다고 합니다.”

    밀양에서 잠시 쉴 때 박불출이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에 충주로 갈 필요는 없다.

    “쉴 만한 곳이 있습니까?”

    이재영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했다.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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