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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국민대, 해인대, 마산대, 경남대- 최임식(LH공사 지역상생협력단장)

  • 기사입력 : 2020-01-15 20: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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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7월 미 군정청은 일제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화하는 방안을 발표하자 교수, 학생 등 내부구성원은 물론 중등학교까지 반대 데모에 나섰다. 일제 대학이라는 비정통성, 정부 미수립의 시기상조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국립대로 강행하고 이 대학이 지금의 서울대로 이어져 왔다. 이때 국대안에 반대, 국민대로 전학해 제1회로 졸업한 이가 남덕우 전 국무총리다. 국민대는 신익희 등 상해 임정요인들이 귀국해 1946년 9월 1일 민족대학으로 설립한 것이다. 미군정의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해 ‘국민대학관(國民大學館)’으로 출발했다, 교사(校舍)가 없어 종로구 내수동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을 빌려 야간부 학생을 모집했다. 초대 신익희 이사장 후임으로 1947년 10월 취임한 최범술 이사장은 사천 다솔사에 주석한 스님이었다. 해인사 사찰부지를 학교에 기부하겠다고 하고 1948년 8월 재단법인 국민대학을 정식인가받았다. 그러나 사찰부지 출연이 어려워지고 최범술이 물러나자 학생들은 등록금 일부로 1949년 9월 창성동(현 정부세종청사)에 교사를 신축했다. 한편 최범술은 마포에 별도의 ‘국민대학관’을 세우고 학생들을 받았다. 창성동 국민대는 쌍용그룹 김성곤이 인수해 1959년 북악산 아래 정릉으로 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포의 국민대학관은 1952년 3월 교사를 합천 해인사로 옮기고 교명을 ‘해인대학(海印大學)으로 바꿨다. 그해 7월에는 빨치산들이 해인사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우고 학생들을 납치해 갔다. 자연히 대학 이전이 거론되고 진주, 마산의 유치전 끝에 그해 8월 진주로 이전, 천전국민학교를 사용했다.

    그러나 인구 7만명의 진주에 도립 진주농대도 있어 입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 마산시는 부산대 약대가 이전한 건물을 무상양여하고 대학은 1956년 4월 마산 완월동으로 이전했다. 교명은 1961년 마산대학으로, 1971년 경남대학으로 각각 바뀌고 198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국민대와 창원 경남대는 같은 뿌리의 민족사학이다. 신흥무관학교가 뿌리인 경희대와 함께 독립운동가의 선각정신이 살아있는 명문사학이다.

    최임식(LH공사 지역상생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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