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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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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꼴망태- 전형수(전 경남도청 법무담당관)

  • 기사입력 : 2020-01-02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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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문득 지난 세월의 편린이 몰려온다. 살림밑천이자 농사일에 없어서는 안 될 암소 한 마리가 있었다. 풀만 제대로 뜯어다 주면 노련하게 달구지를 끌었다. 들에서 집마당까지 짐을 실어나르고 쟁기질하다 돌에 걸려도 적당히 멈춰설 줄 아는 등 주인과 호흡이 절묘했다. 일년에 송아지 한 마리씩 낳아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더 늙기 전에 제 값을 받아야 한다며 우시장에 팔아 넘겼다.

    힘든 일은 다 부려먹고 그저 건실했던 그 소가 매여 있던 마구간이 휑하게 비던 날 그 소의 마지막 운명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며칠 뒤 젊은 소로 대체되었는데 이놈은 길들여지지 않아 내 말을 정말 소같이 듣지 않는지라 화가 치밀어 무자비하게 때린 적도 있다. 소가 사람 같을 수 없거늘, 소를 소로 보지 못한 내 어리석음의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그때는 잘 몰랐다고 핑계대고 싶고, 비라도 오는 날 소 몰고 나가기 싫었던 기억을 반추하며, 꼴망태는 또 내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본다.

    소 멕이고(먹이고) 꼴(풀) 한 망태 베어 지고 들어가야 밥값이라도 하던 보릿고개 시절! 풀을 찾아 산과 들로 헤매는 게 일과였다. 그런데 정작 마음놓고 풀을 베고 소를 멕일 장소가 극히 제한돼 있었다. 집 뒷산과 앞들 뚝방뿐이었다.

    거기다 온 동네 소가 함께 몰려 나와 매일 북새통이니 풀도 고이 자랄 겨를이 없었다. 나머지는 논밭이고, 풀이 있을 만한 곳은 주인이 밤낮으로 관리하는 언덕받이인데 눈독을 들일 만한 곳은 그곳뿐이다. 어쨌든 해질 무렵 집에 들어 갈 때면 어김없이 꼴 한 망태는 채워 가야 하는 것이 식구로서의 도리였다.

    당시엔 그렇게 애타도록 절실했던 풀이 이젠 지천에 널렸다. 산들바람에 소복이 자란 파란 풀잎이 잔물결 칠 때면 얼른 다른 사람 손 타기 전에 꼴 한 망태 베고, 내 송아지 한 마리 풀어 놓아 뜯기고, 나머지는 건초로 만들어 겨울나기 대비를 하면 얼마나 오질까. 그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올 때쯤 되면 잔등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볼기짝이 토실하고 건실한 어미소 한 마리….

    전형수(전 경남도청 법무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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