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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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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약속- 서영수(수필가)

  • 기사입력 : 2019-08-29 20: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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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속은 지킬 때 아름답다. 사소한 말,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실없이 던질 까닭이 없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상대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무시하는 언행이니 작은 언약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 조그만 신의가 큰 믿음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을 만드는 것이니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뢰의 시작이요, 삶의 마지막 보루다.

    “식사 한번 합시다.”

    점심 혹은 저녁만 먹자는 인사말이 아닐 것이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고 신뢰한다는 뜻이니 약속을 받는 아랫사람의 경우라면 행복한 긴장을 하게 된다.

    반면, 대면하기 싫은 사람, 믿음이 가지 않은 사람이라면 약속의 의미가 없다. 커피 한잔 나누는 시간도 아까울 따름이다.

    약속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톨스토이의 짧은 이야기다.

    “어느 시골 여행길에서 어린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그의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백합꽃 수가 놓인 톨스토이의 가방을 갖고 싶다고 말이다. 그는 소녀에게 약속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돌아오는 길에 소녀의 집을 방문했다. 하지만, 소녀는 병으로 죽고 없었다. 그는 소녀가 가방을 갖고 싶어 했던 날 주지 못함을 후회했다. 소녀의 어머니에게 묘지까지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말했다.

    “따님은 죽었지만, 나의 약속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소녀의 무덤 앞에 가방을 놓은 톨스토이는 소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촉한(蜀漢)의 맹장 장비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원술을 토벌하러 가게 된 유비에게 술 마시지 않고, 부하에게 매질하지 않고, 신중히 처신하여 서주를 잘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무절제한 생활을 일삼다 여포에게 땅을 내주고 말았다. 입에서 나온 말에 마음이 응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구불응심(口不應心)이란 고사성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직장 동료가 점심을 먹자고 한다. 모처럼의 약속이라 잊어버리지 않도록 뇌세포 하나하나에 단단히 일러 놓는다. 스마트폰과 달력에 기록하느라 부산을 떨었지만, 약속한 날이 되어도 아무런 말이 없다. 놀이에 열중한 아이처럼 딴전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른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해한다. 의미 없는 문장을 무겁게 받아들인 나의 잘못이 크다.

    지나가는 이야기를,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를 새겨들었다고 순진한 사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약속은 지위의 높고 낮음에 무관하고,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약속이다. “앞에 한 작은 약속이 나중에 하는 무거운 약속보다 더 소중하다”라는 진리를 망각해서도 안 된다. 오늘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파기하는 사람이라면 내일의 약속도 민들레 홀씨보다 더 가볍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하자는 친구의 메시지다. 내일이 아닌 내일이나 모레쯤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해석학 공부라도 해 두었으면 이렇게 당황해하지는 않을 텐데. 고민이다.

    서영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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