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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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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꽃화분이 서른한 개- 성선경(시인)

  • 기사입력 : 2019-07-25 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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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화분에다 고추를 한 열 포기쯤 키운다.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꽃이 예뻐 키운다고 그랬더니 친구들이 웃었다. 야! 별 모양의 꽃이 얼마나 예쁜데. 이렇게 눙치고 으쓱거리는 것도 사실 다른 뜻도 있다. 잘 키우지 못하는 내 고추 화분에 대해 시장에 가면 풋고추가 천 원이면 한 소쿠리라는 아내의 말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기도 하니까. 꽃을 키우는 일이나 사람을 키우는 일이나 경제성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입택 5주년, 아내와 나는 수련 화분 하나를 들였다. 마당이 좁은 탓에 연못을 팔 수 없는 아쉬움을 수련 화분 하나가 충분히 그 마음을 풀어주었다. 지름이 1m를 조금 넘는 수련 화분에 수련과 부레옥잠과 물칸나, 물상추 등을 심어 놓으니 내 눈엔 훌륭한 연못이다.

    수련 연못(내 마음에는 수련 화분이 수련 연못이다)을 조성한 며칠 후 고인 물의 이끼에는 미꾸라지가 최고라는 말을 듣고 미꾸라지 몇 마리를 사서 수련 연못에 넣어 두니 아주 내 마음에 집안에 어룡(魚龍) 몇 마리를 키우는 듯 마음이 흡족했다.

    정년을 한참 앞두고 명예퇴직을 한 나는 일상의 무료를 다스리기 위해 하나둘 화분을 들이다 보니 어느새 꽃 화분이 서른 개를 넘겼다. 물을 주고 꽃이 피는 것을 감상하며 처음 한 해를 잘 넘겼다. 그러다보니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꽃 화분이 줄지 않고 자꾸만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이제는 고추화분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고추화분이 문제다. 삼 년째 화분의 흙을 바꾸지 않고 고추를 심다보니 연작의 피해인지 고추나무가 시들시들했다. 아무리 봐도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이 없는 초보자의 솜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아내는 무슨 농사를 이따위로 짓느냐고 눈총이 대단하다. 나로서도 실로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는 시장에 가면 풋고추 한 소쿠리가 어쩌고저쩌고 했고, 나는 나대로 역정이 나서 꽃을 보기 위해서 키운다고 항변을 한 터였다. 그 고추화분이 어느 날 꽃을 피우더니 몇 개의 고추가 열렸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더욱 애잔히 바라보곤 한다. 봐라! 세상에 꽃을 피우지 않는 화분이 어디 있어. 나는 역시 훌륭한 화초꾼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고추화분을 꽃이 예뻐서 키운다고 너스레를 뜬 것이다.

    그래, 모든 꽃은 예쁘다. 예쁘지 않은 꽃이 없다. 고추꽃도 예쁘다. 별 모양의 하얀 꽃이 정말 예쁘다. 수련화분의 수련만은 못해도, 만데빌라처럼 화려하진 못해도, 봄날에 잠깐 피었다가는 잎조차 시들고 마는 수선화나 아네모네나 금낭화보다 더 예쁘다. 고추 꽃이 피었다. 고추 꽃이 피었다. 나는 자랑이 늘어졌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마음을 한 바퀴를 돌리느냐, 돌리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천양지차(天壤之差)고 마음자리가 천지(天地) 차이다. 앞뜰에 오동잎이 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느끼듯, 나는 고추 화분 하나에 온 봄날의 환희를 다 느낀다.

    내가 지나온 60년의 세월이 어떤 날은 참 잘 살았다 싶다가도, 어떤 날은 이렇게 형편없는 삶이 어디 있는가?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 한 바퀴 돌리고 생각하면 꽃 화분을 들인 것처럼 마음이 다 환하다.

    내가 이 봄날 잘한 일은 수련 화분을 들인 일과 고추화분을 키운 일이다. 저렇게 예쁜데, 꽃이 저렇게 예쁜데. 나는 다시 자랑이 늘어졌다.

    성선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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