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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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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8) 대가야(大伽倻)

장엄한 문화유적에 깃든 대국의 풍모
수로왕 둘째동생 ‘대로’가 건국
520년간 주변국과 대등한 국력

  • 기사입력 : 2017-08-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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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능선에 줄지어 선 낙타등 모양의 지산동고분군.


    ▲가야연맹의 맹주

    경북 고령군(高靈郡)은 가야산과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이뤄 놓은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가야(大伽倻)의 고도(古都) 대가야읍에는 성터를 비롯해 고분군, 토기요지(土器窯址), 고분출토 유물, 산성, 그리고 우륵(于勒)이 최초로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정정골 등 곳곳에 문화유적이 많아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대가야 500년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대가야는 수로왕의 둘째 동생 대로(大露) 또는 뇌질주일(惱窒朱日)을 시조로 서기 562년 마지막 제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이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내주기까지 520년간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한 강력한 국가였다. 따라서 대가야를 상가라(上伽羅)라고도 했다.

    대가야의 건국설화는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첫째 가락국(駕洛國)의 건국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온 6개의 황금알에서 깨어난 동자(童子) 가운데 셋째인 대로(大露)가 지금의 고령지방을 중심으로 대가야국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가야산신과 이비가(夷毗訶)라는 천신 사이에 태어난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이 됐다는 건국설화다.

    옛 대가야땅 고령에는 대가야읍을 중심으로 가야시대의 유물 유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대가야읍 중화리의 주산성(主山城: 사적 제61호)과 고분이 무리 지어 있는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사적 제79호), 벽화를 가진 석실분인 고아리벽화고분 (古衙里壁畵古墳: 사적 제165호) 등은 대가야국의 강성했던 역사와 당시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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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44호분을 재현해 놓은 대가야왕릉전시관의 내부.

    ▲왕들의 무덤 지산동고분군

    대가야읍에 들어서면 진산인 주산(主山: 311m) 능선에 솟아오른 낙타등 모양의 고분들이 읍 어디에서나 한눈에 들어온다.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싼 산 위에는 대가야 시대의 주산성이 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동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해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7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 대가야 최대의 고분군이다.

    지난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 때 큰 고분에 한해서 일련번호를 정했기에 대, 중, 소로 구분해 72호분까지 이름을 지어 팻말을 박아 놨다. 그래서 고령지방에서 비로소 대가야의 ‘大’자가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산 능선에 솟아오른 낙타등 모양의 고분군은 신라나 백제의 고도에서 볼 수 없는 이 땅의 무덤들 중 가장 장엄한 풍경이다. 대가야 사람들은 높고 시원한 산 능선을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믿었고 최고의 명당자리로 생각해서였을까.

    지산동고분군이라 부르는 이 무덤들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고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덤 속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가야가 일본의 정복지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 일본 문화의 선구자였음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이 고분들은 지난 1977년 발굴을 시작으로 44호분에서 대규모 순장묘가 발견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고분에서 가야금관(伽倻金冠)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가 출토되는 등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殉葬墓)가 이곳에 있다.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이 44, 45호 순장고분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 있었던, 주인이 죽으면 시종들도 함께 묻는 순장제도를 실증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이곳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 금은 장신구, 토기, 철기 등 수많은 유물은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가야박물관의 유물들은 대부분 복제품이지만 신라금관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가야금관의 또다른 아름다움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처음 금관이 발굴된 이래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30여 점이다. 백제와 고구려에서 출토된 2~3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나왔다. 1950년대 출토된 가야금관(국보 제138호)은 호암미술관에 진열돼 있다. 또 1998년에는 대가야의 금동관이 사상 두 번째로 복원 공개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산동 30호분 출토유물을 보존처리하던 중 금동관이 발견된 것이다.

    대가야박물관 옆에 자리 잡은 지산동 44호 고분모형은 고대 우리나라 순장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봉분은 직경이 26m, 높이가 6m나 된다.

    거대한 봉분 속의 주인공은 돌로 쌓아 큰 석실을 만들어 안치했고 서쪽과 남쪽에 석실을 따로 만들어 부장품을 가득 채웠다. 32기의 순장묘에는 한 널에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씩 매장돼 있다. 두 사람 매장 시에는 머리가 정반대였고 성인 남녀와 어린 여자아이까지 합장했다고 한다.

    또 대가야읍 연조리에는 대가야국 성터(현 향교자리)와 왕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왕정(王井 또는 石井, 御井)이 남아 있다. 고대(高臺)라고도 하는 향교 자리는 주산산성을 배후로 하고 앞에는 회천이 흐르며 망산산성이 둘러 있어 언뜻 봐도 요새임을 알 수 있다. 대가야국 520년간 도읍지를 방위해온 대가야성지(大伽倻城址)라고 전해오고 있다.

    ▲가야금 창시 우륵의 고장

    대가야는 가야금 창시자 악성(樂聖) 우륵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우륵은 고령군청에서 서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대가야읍 쾌빈리, 속칭 금곡(琴谷) 또는 정정골이라는 곳에서 가실왕(嘉悉王 또는 嘉實王)의 명을 받아 중국의 쟁(箏)을 본떠 가야금을 만들었다. 이 12현금은 연주를 하면 ‘정정’하는 웅장한 소리가 났다고 해서 가야금을 만들던 마을 이름을 정정골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륵은 신라에 망명해 제자들에게 가야금과 노래를 전수, 후세에 악성(樂聖)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거주지였던 금곡 건너편 언덕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고령군은 지난 2005년부터 매년 4월에 ‘대가야체험축제’를 열어 고령이 대가야의 왕도였음을 상기시키고 대가야 출신인 우륵을 추모하는 행사도 아울러 열고 있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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